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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 #책

1년 전 · #책

때는 스트로크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던 지난해 10월이었다. 나는 IR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도중에 친구들을 떠나와 대전으로 향했다. 여행 도중에 당일치기로, 한라산에 올라가기 전날에, 그것도 여행보다 늦게 픽스된 일정에 참석하러 중간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로 도리에 어긋나지만, 그만큼 그 미팅은 내게 중요했다. 졸업한 이래로 대외적으로 변변히 내걸만한 어떤 타이틀 없이 창업이라는 미명 아래 살아오던 내 삶에,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계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을 이해해 준, 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하고 고맙다. 미팅은 총합 30분도 안 되어 끝이 났다. 내 발표뿐만 아니라, 질의응답에 이어 투자는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즉답을 듣기까지의 모두를 합하여 그랬다. 심사역 분께서 투자가 어려운 이유를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는데 듣는 내 입장에서도 100% 이해가 됐다. 발표와 이어지는 질의응답을 내가 옆에서 제삼자로서 들었다면 나도 투자를 반대했을 것이다. 사실 투자를 받을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그저 ‘투자만 받으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IR을 잡았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사업들을 효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시도해 보길 어언 1년 가까이였다. 그때의 노력을 스스로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경험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덜 주관적인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런 시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의외로 사업 아이템이나 그것의 유망한지의 여부가 아닌, 사업의 모든 것을 나 혼자 한다는 점이었다. 정답지는 없고 답해야 할 질문들만 가득한 상황 속에 지쳐가는데 함께 의논할 사람은 없었고, 내 정신 상태가 요동을 칠 때 이를 상쇄해 주며 힘을 불어넣어 줄 사람도 없었다. 소속의 욕구를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느끼고 있던 이런 상황 속에서, IR을 했던 바로 그 VC에서 들어온 입사 제안을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발표를 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12월 그 발표를 들었던 심사역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에서 새롭게 투자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고, 아이디어를 줄 테니 해볼 생각이 있냐는 말인줄로 처음에는 알았는데, 대면 미팅으로 다시 만나 들은 자세한 이야기는 곧 그 회사에 들어올 생각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리며, 투자와 재무·회계처럼 내가 생소하게 여겼던 분야의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성공적인 창업이므로 3~4개월 정도만 바싹 일하며 열심히 일하고 또 배우고 나와서 그걸 바탕으로 다시 도전을 이어가자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올해 초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지는 부산 센텀시티였다. 서울에 살던 보통 사람이라면 기겁했겠지만, 뭐 내 역마살이 하루이틀 일이어야지. 새로운 도시를 탐험하는 일은 즐거웠고 덜 추워서도 좋았다. 지난겨울에는 덕분에(?) 눈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일도 즐거웠다. 내가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쌓아놓았던 개발 기술 스택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바와 아주 잘 맞았다. 회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내가 즐겁게 만드는데 돈도 들어왔다! 내가 회사의 유일한 개발자였던 덕에 업무 강도나 형태도 나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장기적인 개발 목표 아래 나를 작년 내내 괴롭혀왔던 외로움과 불안이 점점 걷히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이 떠난 그 자리에 이번엔 고민이 들어앉았다. 3~4개월만 회사에 다니고 다시 창업에 도전하자는 그 생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직장인의 삶에 안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난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회사 일은 내가 성장하기보단 그간 쌓아놓은 것을 소모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창업 또한,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이미 시도해 본 시점에서 이제는 확실히 성공하지 않는 이상 그 경험들은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정체, 심지어는 퇴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결국 모든 것은 다음 창업의 성공 가능성에 달려있었고, 그건 높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보았던 수많은 창업팀의 배경, 같은 기간 활동했던 창업 학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사업에 대해 가졌던 태도, 선발되지 못한 창업지원사업들 등 지난 몇 달간 겪었던 모든 환경과 지표가 no-go를 외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신념이나 인·물적 자원 그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다시 시도한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새로운 연구를 시도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 시니어들을 만나 성장할 수 있는 대기업으로의 이직? 사업의 성공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폭풍 성장 중인 스타트업으로의 이직? 아니면 이 회사에서 야망을 펼치기? 오랜 고민 끝에 진학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사업에 있어서든 진로에 있어서든 어떤 선택을 내릴 때 느끼는 것은 그 선택의 중요도가 높을수록 그것의 도출을 위한 논리적인 사고는 점점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는 정량적으로 계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하나의 결론으로 종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되면 선택은 개인의 철학과 신념의 몫으로 넘어간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사업을 경영하는 데에 철학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도 내 철학과 신념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창공과 우주가 나에게는 그것이었다. 내가 연구개발에 일조한 어떤 물체가 전인미답의 우주 공간에 닿는 것, 그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내 자아실현의 순간으로 생각해 왔다. 그럴 수 있다면 잠을 좀 못 자도, 돈을 좀 못 벌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포기한 다른 수많은 선택지에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항공우주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지인들에게 알리면, 왜 전산(컴공)과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이 돌아오고는 한다. 그 질문을 받은 횟수가 이미 열 번도 넘는 것 같다. 항공과 전산을 모두 전공한 데다가 나의 지난 행적들은 대부분 개발 쪽에 몰려있었으니 아주 자연스러운 물음이다. 그러나 전산 쪽 연구와 웹 개발은 내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뿐, 나의 신념에까지 닿아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택을 내린 이후로 삶은 참 바쁘게 흘러갔다. 우선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은 지난 4월, 가을학기 원서 접수 마감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그 이틀 안에 원서, 자기소개서, 우수성입증자료를 전부 준비해서 보냈다. 마감이 목요일이어서 보통 때 같았으면 회사 다녀오면 시간이 절대 날 수가 없는데, 기가 막히게도 전날 수요일이 국회의원 선거로 인한 공휴일이었다. 하루 종일 해운대 앞에 스타벅스에 죽치고 앉아 자소서를 써 내려갔다. 서류 제출 이후에는 퇴근하면 해운대와 광안리 근처 스터디카페를 전전하며 면접 준비를 했다. 고학년 때부터는 거의 전산과 과목만 들었기에 수강한 지 길면 4-5년 지난 과목들 기억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 일을 마친 후에 또 공부를 하자니 정말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면접 당일까지도 준비 상태는 완벽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면접에서도 똑바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았다. 면접은 5월 중순의 금요일로 잡혀 그날 연차를 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갑자기 딱 그 주에 일주일 전체 휴가 선언을 하여(!)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김에 같은 주 월, 화요일에 소속 연구실 결정을 위한 교수님 여러 분과의 면담도 잡았다. 원래는 면담을 주초에 끝내고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더 준비할 예정이었는데, 운명의 장난인가, 친할아버지께서 화요일에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병환을 앓고 계셨던지라 감정을 완충할 기간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감정의 동요 속에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로 면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화요일에 뵈었던 교수님 면담부터 금요일 면접까지가 딱 3일인데, 물론 정신·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삼일장 전체가 일정이 겹치지 않게 딱 들어맞은 것은 할아버지께서 내 편의를 봐주신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6월 중순에 합격이 확정되면서 회사에 퇴사 예정임을 밝혔고 8월 20일에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막간의 시간 동안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9월 초에 개강하여 이제 연구실에 출근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즐겁게 다니고 있다. 교수님은 존경스럽고 인자하시며 연구실 형·동기들은 친절하다. 무엇보다 나랑 결이 잘 맞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교수님을 포함해서 10명대 초반의 인원이 모두 남자인데 또 남고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고, 딱 만족스러울 정도로 편한 느낌. 또 일찍 결혼하셨거나 자녀까지 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인생 선배로서 조언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라도 젊고 체력이 좋을 때 결혼해서 자녀를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하곤 하는데, (박사까지 한다는 가정하에) 앞으로의 6년은 내 길이 확정적이라는 안정감과 함께 옆에서 지켜본 연구실 선배들의 모습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전에 이 연구실에서 연구를 해본 경험도 딱히 없다 보니 지원할 때까지도 세부 관심 분야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확정된 이후에 교수님께서 이것부터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면서 주제를 하나 던져주셨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주제가 아주 마음에 든다. 앞으로 분명히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잘 해낸다면 앞서 말한 내 자아실현의 순간이 이 주제에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전전 문단에서 (박사까지 한다는 가정하에)라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물론 내 희망은 앞서 말한 연구 주제가 나와 너무 잘 맞아서, 석사 이후 박사과정까지 자연스레 이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뜻대로 되리란 법은 없다. 생각지 못한 어려움으로 연구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해내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하는 건 맞지만, 죽을 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 자신에게 일러두고 싶다.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석사, 이어 박사를 갔다면 난 이 길밖에 몰랐겠지만 한번 밖을 방황하다 돌아온 지금은 바깥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안다. 항상 그 세상을 염두에 두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결코 짧지는 않을 대학원생으로서의 기간 동안 내가 지녀야 할 태도를 여기 일러두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한 인생의 진리이다. 사소하고 당연한 말들을 굳이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여 여기에 나열해 놓는 것은, 올해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삶의 다른 부분들에서 마주친 다수의 상이한 상황들에서 이 이치들이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대부분의 일들은 환경과는 별개로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기에 달렸다. 일관적이고 장기적인 노력(consistency and perseverance). 한방은 없다. (루틴의 확립도 포함)
2년 전 · #수필
지지난 토요일(이 글의 작성을 시작한 건 8월 중순)에 대전에 당일치기로 방문해 석사 과정 동안 머무를 집을 계약했다. 집 때문에 대전을 내려간 건 사실 두 번째였다. 다시 2주 전, 그러니까 한 달쯤 전에 이미 한번 내려와 방을 둘러봤었다. 지난 글 에 썼다시피 차를 끌고 멀리 나가는 것을 불사해서라도 조건이 가장 좋은 집을 찾고자 어은동, 궁동부터 봉명동과 월평동까지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없었고 집들이 모두 나열한 조건 중 꼭 하나씩을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온 터였다. 나를 데리고 방을 보여주러 다니신 중개업자분께서 꽤나 열정이 가득하셔서, 내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새롭게 올라온 조건에 맞는 방들 사진을 계속 보내주셨다. 처음 몇 개는 그저 그랬는데 계속 보다 보니 한 개가 괜찮아 보였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테라스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더라. 이 집에도 개인 테라스가 있었고, 북동향이긴 했지만 테라스가 있다면 수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다음 날 바로 내려갔다. 방은 사진과 다를 바 없었고 비교적 신축에 월세도 높은 편은 아니었다. 온 김에 다른 방들 몇 개도 더 둘러보았지만 그곳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땡볕에 방을 대여섯 개씩 보고 나니 진이 빠질 대로 빠졌고 내 마음은 그곳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날 밤에 부모님과 인터넷으로 보았던 아파트 매물이 떠올랐다. 사실 난 이미 학교 근처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있었다. 학부를 다닐 동안 궁동의 두 군데에서 자취했었는데 첫 번째는 3평 정도의 원룸이었고 두 번째는 무려 24평형의 아파트였다(!). 자, 나를 금수저라고 부르기 전에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 사실 난 첫 번째 원룸을 이을 다음 집으로, 똑같은 원룸이지만 8~10평 정도의 큰 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궁동에서는 3~4평, 커봤자 5~6평 정도의 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궁동에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원룸이 넓어지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당시 나와있는 궁동 매물 중에서 7평 이하를 제끼고 나니 가능한 다음 매물은 24평형 아파트인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궁동에 몇 개 없는 아파트 중 하나였던 그 건물에 17평형과 24평형 이렇게 두 형태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17평형은 호실이 많지 않아 그중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이 없었다. 월세도 높지 않았다. 높지 않기만 한 정도가 아니라 면적당 월세를 생각하면 원룸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았다. 내가 살았던 24평형 아파트의 보증금/월세에 법정 전월세전환율을 적용하면 이번에 보았던 9~10평 원룸과 조건이 완전히 동일할 정도다. 3년의 시간차와 더 높은 관리비를 감안하더라도 확대되는 면적에 비해 비용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이런 탐색과 비교 과정을 거쳐 24평 아파트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다시 원룸부터 찾아보았는데, 그때 아파트에 살아보면서 면적과 가격 외에도 살기 좋은 집이 갖추어야 할 큰 요소가 또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옵션이었다. 아파트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학부 때 살던 아파트에도 일체의 붙박이 부엌 정도가 가구의 전부였다. 놀랍게도 본가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딱 하나씩 놀고 있어, 이사를 들어갈 때 조립식 책상 2개 + 책장 + 옷걸이 + 매트리스와 함께 용달을 불러 서울에서 대전까지 수송했다. 그렇게 듬성듬성 채워 넣은 가구들은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당연히 부족했다. 그렇다고 새 가구를 사자니 얼마 남지 않았던 졸업에 맞추어 방을 뺄 때 처분하기만 곤란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장장 16개월을 24평의 광야에서 단 7개의 가구와 함께 지냈다. 침대 프레임 없이 그냥 바닥에 바로 매트리스를 깔고 잤고, 에어컨 없이 두 여름을 보냈다 1 . 궁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가구를 더 사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시 상경할 때는 용달을 부르지 않고 차 두 대에 실을 수 있는 짐만 남기고 모두 팔아치웠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모른다. 1. (아파트가 산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시원함 + 난 추위를 아주 잘 타고 더위는 잘 참음)의 콜라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지? 그 번잡스러운 일들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웬만하면 원룸을 구하고 싶었다. 그간 신축 건물도 많이 생겼으니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날 밤 인터넷으로 어머니께서 학교와 가까운 월평동 쪽 아파트 월셋집을 몇 개 찾으셨을 때도 결국 우리의 결론은 가능하면 풀옵션 원룸을 찾자는 것이었다. 다시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던 궁동 거리로 돌아와서, 테라스 있는 그 방으로 그냥 계약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먼 길 온 김에 후회하지 않게 싹 다 둘러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사실 테라스 방이 성에 안 차기도 했다. 일조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내게 북향은 사실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찾아본 아파트는 세 군데, 그중 하나는 담당 중개업자가 휴가를 갔고 또 하나는 세입자 사정으로 당장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남은 한 곳만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신혼부부가 나를 맞이했다. 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건물은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지만 내부는 리모델링해서 나름 깔끔한 편이었다. 면적은 13평으로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고 2 보증금/월세는 테라스 원룸과 완전히 동일했다! 또 테라스는 아니지만 남향으로 난 베란다가 있었다. 2. 사실 전의 24평 아파트는 정말 투머치 그 자체였다. 난 집이 너무 넓어도 안 좋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거실과 안방을 제외한 작은 두 방과 베란다, 안방 화장실 등 내가 쓰지도 않는 공간들까지 함께 청소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딱 10평대 초중반 정도 면적이면 완벽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여기에 가구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생각하던 와중에 신나게 돌아가고 있던 벽걸이 에어컨이 눈에 띄어, 이건 원래 있던 거냐고 부부에게 물어봤다.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왔다고 남편이 대답했다. 또 그럴 생각이 있으면 설치비 정도만 받고 넘겨주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냉장고와 세탁기를 포함해 여기 있던 가구의 대부분을 모두 당근으로 팔아치울 생각이라고 했다. 엥 뭐라고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행복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 가구들을 싼 값에 받을 수만 있다면 아파트의 유일한 결점이 한 번에 해결되는 것 아닌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물어봤다. "그럼 안 가져가시는 것들 다 저한테 파시면 안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더 경쾌했다. "그러시면 저희도 편하고 감사하죠." !!! 정확한 조건은 다시 협의하기로 하고, 미소가 한가득인 채로 일단 집을 나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말했다. 하하하하 저 로또 맞은 거 같아요. 땡볕에 먹었던 더위도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다시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돌아와 내가 받으면 좋을 가구를 쫙 정리했다. 찾아보니 가구 버릴 때 드는 폐기물 수거 비용은 생각보다 얼마 안 하더라. 그래서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되는대로 받아놓자고 생각했다. 집에 방문했을 때 부부 허락을 받고 찍어두었던 영상을 돌려가며 가구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발신] 가격 흥정은 내가 직접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중개인께서 대신 해주시겠다길래 마다하지 않았다. 중개인은 내가 적어놓은 목록을 넘겨받고서는,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써놓아서야 싸게 받을 수 있겠냐고 했다. 그러나 대충 이야기해 두었다가 이사 당일에 가서 의견 차이로 누군가의 기분이 상하거나 계약이 파투나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으므로, 그대로 전달하고 그중 양도 가능한 것을 품목별로 가격을 적어 회신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를 부를까, 긴장과 궁금함 속에 20분여가 흐르고 마침내 답장이 왔다: [수신] 오. 내가 그렇게 부탁은 했지만, 정말로 품목별로 빠짐없이 가격이 적힌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참 흥미로웠다. 양의 가격뿐만 아니라 그냥 넘겨줄 수 있는 물건에는 0, 양도가 불가한 물건에는 x가 달려있었고 중간에 내가 제기한 의문에 대해서도 답변이 잘 달려있었다. 심지어 내가 빠뜨렸던 세탁기도 새로 쓰여 있었다. 내가 기다리던 한참의 시간 동안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이건 얼마에 넘길까, 토의하는 귀여운(?)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또 한참이 걸릴 수도 있었던 협상을 한 번의 문자 왕복으로 끝낸 나와 부부의 효율성에 탄복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즐거웠던 건 바로 적힌 가격 그 자체였다! 냉장고 + 세탁기 + 에어컨 + 침대 프레임/매트리스/사이드테이블 + 소파 + 책상 + 의자 + 트레이 + 행거 + 화장대 + 신발장 이 모든 것이 23만 원에! 어떤 구체적인 액수를 상상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내 예상보다는 확실히 낮았다. 부부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그렇게 그대로 받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입자로부터 중개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한 채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알고 보니 전기포트도 만 원에 같이 받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포트를 쓸 일이 거의 없어 그 효용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중개인의 전화 너머로 세입자의 음성이 들렸다: 아니 다른 물건들을 그렇게 싸게 넘겼는데 뭘 또 고민하고 있대요? ㅋㅋㅋㅋㅋ 거의 무슨 강매에 가까웠지만! 내가 선심 써서(ㅎ) 큰 고민 없이 포트까지 받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포트는 내 본가에 있던, 어머니가 나름 철저한 선정 과정을 거쳐 구매하신 것과 똑같은 모델의 것이었다. 정가는 5-6만 원씩 하더라. 협상의 타결과 함께 나의 새로운 집은 그 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운이 굉장히 좋았다. 그 부부는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그러나 내가 포악한 날씨에 굴복해 아파트를 보지 않기로 했다면 그 행운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자취방을 구하는 후배가 있다면 다음의 말들을 꼭 전해주고 싶다: 1. 아파트를 적극적으로 알아보라. 원룸보다는 대체로 비싸겠지만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삶의 질이 올라간다. 어쩌면 원룸보다 쌀 수도 있다. 2. 무조건 발품을 팔라. 집은 더 많은 것을 비교
2년 전 · #수필
가을부터 대학원을 간다. 내 모교와 주전공이었던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그대로, 사실상 졸업학기였던 22년 봄학기가 끝나고 대전을 뜬 지 2년 만이다. 진학을 결정할 때까지 나름의 고민과 걱정이 많았고 지금으로서도 설렘 반 걱정 반인데, 그건 오늘 쓸 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풀어보자. 자연히 다니던 회사는 8월 중하순을 끝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단 출근 형태의 풀타임 근무를 중단하는 것일 뿐, 하던 일은 원격·파트타임 근무로 계속 수행할 예정이다. 회사 내 유일한 개발자로서 이미 대부분의 일은 혼자 해오고 있었으므로 원격으로 전환해도 큰 문제가 없고, 대학원생으로서는 풍족한 소득을 바라기 어려우니 부가 소득이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생각 + 그리고 나만큼 현재 업무에 적합한 사람을 새로이 찾기 어려우며 찾더라도 인수인계에 자원이 드니 가능하면 내가 계속하면 좋겠다는 회사의 생각이 서로 맞아 가능했던 일이다.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나 새로운 근무 형태에 따른 수당을 협상할 일은 아직 남았다. 또 석사 첫 학기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도저히 부업을 할 시간을 내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올해 초에 입사한 후 회사에서 일한 지는 어언 만 일곱 달이 되었다. 지금도 상당히 바쁘다. 올해 초중반까지만 해도 업무의 템포를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 내가 개발해 오던 사내 소프트웨어가 7월에 시작되는 반기 영업보고부터 도입되기로 결정되면서 작업에 기한이 생겼고, 또 배포가 시작된 이후로는 잔 버그들을 고치고 기능을 추가하면서도 직원 사용에 지장이 없도록 하느라 신경 쓸 게 많아졌다. 이제는 회사 사정에 밝으니 주어지는, 입사 직후에는 없었던 잡다한 일들도 많다. 최근에 프로그래밍 외주도 하나 들어왔다. 작업 내용과 수당을 협의해 오다 나흘 전에 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직후부터 평일에 퇴근하고 나서, 그리고 주말인 오늘도 틈틈이 작업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회사에서는 회사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것에 대해 의뢰해 왔다. 주 업무인 사내 소프트웨어 개발 외의 분명한 추가업무이기에 합당한 추가수당을 요구할 수 있어 보였고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평소의 나는 야근을 해서라도 그 일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했다. 수당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지금 하고 있는 주 업무와 외주만 해도 하루가 꽉 차고, 나는 돈을 버는 것 이외에도 삶에서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요즘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시간이다. 다른 무엇보다 정말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 몸이 두 개든 하루가 48시간이든 둘 중 하나는 현실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요즘 그것을 더욱 절실히 바라는 이유는 시간이 늘어났을 때 따를 추가적인 보상이 이렇게 가시적인 경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학부 때 내가 과제나 시험공부를 하는 데에 두 배의 시간을 들이더라도 석차가 반절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지금 내게 두 배의 시간이 주어질 경우 두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제약 요소가, 내가 어떻게 해서도 늘릴 수 없는 유일한 자원이라는 사실이 나를 정말 골치 아프게 한다. 아, 사실 최근에 내 시간이 늘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고 있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LLM. AI hype 속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며 이제는 그 말을 들으면 거부감부터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LLM의 등장으로 정말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프로그래밍은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코드라는 plain text로 이루어지므로 그것을 입출력하는 LLM에 애초부터 적용하기 가장 적합한 업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거기에다 사용 경험이 쌓이면서 모델과 함께 최적의 결과를 내기 위한 소통 방식까지 정립해 나가며 내 작업 효율은 최소 50% 이상 늘어났다. ChatGPT와 GitHub Copilot 등 LLM 기반의 도구들과 함께하며 나는 내 몸이 두 개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찾아오는 산발적인 가속화일 뿐 내가 어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본인의 시간 부족을 타개하는 지속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운영하는 것, 즉 경영뿐이다. 나도 이제 웹개발이라는 좁은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추었으니, 내 휘하에 다른 개발자를 두고 교육, 통솔하며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프로젝트를 빠른 속도로 소화하고 싶다. 그러나 쉽지 않다. 혼자 하는 개발은 템포가 내 마음대로이니 부업으로도 하겠는데 사람을 부리는 순간 그들과 함께 일정 속도를 유지해야 하므로 파트타임으로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풀타임으로 외주를 뛰자니 벌이가 불규칙하고, 나 자신의 장기적인 성장도 미지수이며 ‘업’으로는 개발을 평생 하고 싶지도 않다. 더군다나 팀단위 외주에 fully commit 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잘 꾸려나갈 만한 경영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아이템을 전전하며 창업을 시도해 보고, 그 과정에서 비록 소규모지만 팀 단위로도 움직여보며 절실히 느낀 것은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내게 정말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어릴 때부터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으레 공부 잘하고 행실이 바른 아이(그게 보통 나였다)가 맡던 반장 자리를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아이들이 꿰차는 모습을 보며, 그 두 가지 능력은 분명히 다르며 후자에서는 내가 압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는 과대표나 동아리 회장단과 같은 자리에 경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멀찍이서 지켜보고는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큰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이 결국 리더십과 경영 능력이라면 일부러 좀 더 부딪히며 길러볼 걸 그랬다. 예전에는 경영자가 왜 그렇게 대우받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어쩌면 경영이란 가장 궁극의 기술이 아닐까. 사회가 아직 체계적이지 못하던 근대에 군 장성들이 군을 나와서도 각종 요직에 앉는 일이 흔했던 것은 군대가 당시에 사람을 대규모로 부리던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모르겠지만 대학원에 가서도, 그리고 그 후에도 내가 경영을 연습해 볼 기회가 있다면 이제는 그 기회를 누리기 위해 뛰어들어볼 생각이다. 회사 대표님께서 마침 읽어보라고 주신 책. 이런 내 생각과 맞닿아있으려나 근데 맞닿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고 내일까지 150쪽 읽어가야 함 이 글 쓴다고 미뤘는데 큰일 났다 * 이번에 대전에 내려가서는 차를 끌고 다닐 예정이다. 원래는 같은 월세에 넓은 방을 구하기 위해 학교 근방을 포기하게 될 경우에만 차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위의 생각들과 함께 차가 편리함뿐만 아니라 시간을 살 수 있는 수단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께 '저는 차를 가지고 내려가야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이미 그럴 걸로 생각하고 계셨다더라ㅋㅋㅋ. 비록 노쇠한 마티즈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차가 한두 푼도 아니고 기본 몇 천만 원씩 하는데 그걸 살 바에야 필요할 때마다 렌트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고 말지, 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수천만 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티즈가 생각보다 빨리 퍼지면 내 돈으로라도 중고차를 또 사지 않을까. 이미 2-300만 원씩 하는 고가의 맥북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 쓴 바 있다. 아마도 그런 다음 물건이 자동차가 되지 않을까 싶다.
2년 전 · #수필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너라도 날 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척해 줄 순 없겠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나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나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패닉 - 「왼손잡이」 중 나는 왼손잡이다. 작년에 대학 테니스 동아리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는지 내가 왼손잡이임을 밝히게 됐다. 옆에 있던 친구의 즉각적인 반응은 "엥? 거짓말!"이었다. 내가 뭘 얻자고 그런 거짓말을 해ㅋㅋㅋ 했지만 내가 테니스를 왼손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왼손잡이가 흔치는 않다 보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각종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왼손잡이의 비율은 5%대 정도로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는 성인 전체의 약 10% 정도가 왼손잡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그 비율이 낮은 것은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정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풍토의 젊은 세대로 갈수록 왼손잡이 비율이 늘어났고, 양손잡이를 선택지에 포함한 동신대 조사에서 그들이 8% 정도로 집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출처: 중앙일보 기사 나 또한 선천적으로는 왼손잡이, 후천적으로는 양손잡이다. 아래의 표처럼 행위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손이 상당히 고르게 양분되어 있다. 이 둘을 나누는 비교적 명확한 기준은, 당연하게도 해당 행위의 수행 능력 습득에 있어 타인의 지도를 받았는지 여부이다. 글쓰기와 식사는 부모님께서 의도적으로 오른손으로 가르치셨고 나 역시 별 거부감 없이 배웠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둘은 왼손으로 했을 때 불편한 점이 많다. 사회적인 시선(은 뭐 이제 거의 없는 것 같지만)을 제외하더라도 어색한 팔과 손목의 각도, 잉크 번짐, 옆사람과의 충돌 등 기능적인 측면에서. 배우지 않았는데 오른손으로 하는 것도 종종 있기는 하다. 당구공 치기 등. 왼손 오른손 그리기 던지기 핸드폰 조작 교통카드 태그 (이게 제일 불편) 자 긋기 (오른손으로 자 잡고 왼손으로 긋기) 수정테이프 긋기 뚜껑 여닫기 책 훑기 (뒤부터) 옷 걸기* 기타 (못 치지만 친다면) 크로스백 매기 (가방이 오른쪽에 가게) 소총 견착, 발사 (초딩 시절 BB탄총 사용 경험에 기반) 쓰기 휘두르기/치기 숟가락·젓가락·포크 들기 양치질 가위질 칼질 큐대로 당구공 치기 권총 발사 (소총과 사용 경험 동일) 무엇으로 해도 이상하지 않음 농구 슛 (둘 다 못함) 행위에 따라 다른, 내가 주로 사용하는 손 *나는 오른손으로 옷걸이를 행거에서 빼어 왼손으로 옷을 걸고, 결과적으로 옷걸이를 다시 행거에 걸었을 때 옷은 왼쪽을 향하게 된다. 그렇게 하니 옷가게에서는 입었던 옷이 다른 옷들과 반대로 걸리는 경우가 자주 생기길래 이것도 왼손잡이의 습성인가 보다 했는데, 왼손잡이들이 다 그러진 않는 것 같다 . 이 말인즉슨 오른손잡이도 나와 같이 거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글씨를 정말 많이 썼고 그만큼 오른손이 단련이 되어, 어느새 그리기도 오른손이 더 편해진 것 같아 내가 아예 오른손잡이로 개종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때 품기도 했었다. 지금도 글에 가까운, 직선이 많이 포함된 그림을 그릴 때는 오른손이 나가게 되는 건 맞다. 그러나 스케치나 붓 터치 등 유연한 스트로크가 필요한 그림은 여전히 왼손이 편하다. 그리고 이렇게 주요한 행위들이나 주 사용 손 분포가 고른 거지, 목록에 담기 어려운 수많은 잡다한 일들은 전부 왼손으로 한다. 왼손으로 글도 쓸 수 있다. 다만 심한 악필에 속도도 매우 느려서, 정말 "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정도이다. 나는 그 정도는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오른손잡이들이 왼손으로 글을 쓰려고 하면 펜에 힘 자체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중학생 때쯤인가, 이런 비교우위를 살려서 아예 양손잡이가 되어보자 하고 일부러 왼손 글쓰기를 연습한 적도 있으나 곧 포기했다. 오른손으로 뻔히 되는 걸 왼손이 못하니까 너무 답답했다. 십수 년 간의 누적 경험은 역시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내가 박명수 씨보다는 잘 쓰는 듯 과거에는 대놓고 박해를 받았고 요즘도 때때로 교정의 대상이 되며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명확하지만, 난 내가 왼손잡이인 것이 마음에 든다.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 왼손잡이가 지능이나 창의력이 높다느니, 위인 중에 왼손잡이가 많다느니 하는 소문들은 다수 연구로써 모두 부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왼손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점은 분명 간혹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훑어볼 때 나는 오른손으로 책을 받치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때문에 내용을 거꾸로 보게 되곤 한다. 한편 거의 유일하게 왼손잡이가 명백히 유리한 분야가 있는데 바로 스포츠다. 타인을 상대해야 하는 운동에서 왼손잡이들은 자주 보기 어려운 공격 패턴을 상대에게 선사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의 운동을 오른손잡이인 가족이나 강사님께 배운 탓에 애석하게도 그 이점을 하나도 누리지 못했다. 라켓, 방망이, 스틱 모두 오른손으로 휘두른다. 심지어 야구에서는 보통 우투좌타가 가장 유리하다고들 하는데 난 던지는 건 또 왼손으로 해서 좌투우타다. 대학교 2학년, 테니스 동아리에 막 들어갔을 때에는 이런 아쉬움을 염두에 두고 테니스는 처음부터 왼손으로 치려고도 해봤다. 이전에 테니스를 쳐본 경험은 손에 꼽지만 탁구, 배드민턴 등 다른 라켓을 휘두른 세월이 길어 쉽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곧 포기했다. 나중에 자식이 왼손잡이라면 운동은 꼭 처음부터 왼손으로 가르쳐야지. 거울모드로 나를 따라하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아. 축구는 자식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꼭 왼발잡이로 가르칠거다(*나는 오른발잡이다.). ~발잡이는 단지 선택의 문제인줄 알았는데 이것도 선천적으로 오른발잡이 비율이 우세하다 네*? 그러나 듣거라 미래의 아들딸아, 너희는 최소 왼발잡이 가능하면 양발잡이가 될거다. 아빠가 왼발을 못 써서 놓친 기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왼발로 차려고 하면 내 모습이 마치 축구 한번도 해보지 않은 5살 아이처럼 되어버리고 마는걸… *재밌는 건 ~손잡이와 ~발잡이가 어느 정도 <a
2년 전 · #수필

다섯 달만에 돌아온 서울. 가장 좋아하는 계절. 앞으로의 세 달 동안 나는 서울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있고 그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귀경 이후 첫 주말, 토요일인 어제 점심에는 2019년 봄에 미래숲 한중녹색봉사단원 신분으로 함께 내몽골 사막으로 식수 봉사를 떠났던 사람들을 만났다. 봉사단 활동 자체는 일회성이었으나 그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었다. 또 다들 붙임성이 좋아 누군가 만나자고 하면 거기에 잘 호응하여 쉽사리 모임이 결성되므로 다녀온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이 얼굴을 보고 있다.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점심(이었지만 떠들다보니 다섯 시가 넘은) 약속을 마치고는 여의도 <책읽는 한강공원> 행사를 갔다. 요즘 한강은 탁 트인 전망과 날씨 덕에 원래도 책 읽기가 좋은데 거기에 빈백을 깔아놓으니 편안함이 추가되어 정말 독서 낙원이 따로 없더라. 오후 두 시에 열어 아홉 시까지 하니(단 토요일만) 점심 일정을 끝낸 후에도 느지막이 와서 원없이 책을 읽다 가기에 좋다. 나도 여섯 시쯤 도착해서 한참 「삼체」를 읽다가 슬슬 춥고 배고파질 때쯤 짐을 챙겨 떠나왔다. 여유가 되는 다음 토요일에는, 그때는 외투와 요깃거리를 제대로 챙겨 다시 방문해야지. 일요일인 오늘은 원래는 새벽같이 일어나 잠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 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첫번째로 개최되는 이 축제는 기존 3종 경기의 종목 당 거리를 많이 줄여 일반 시민들이 한강공원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축제다. 초급자와 상급자 코스로 나뉘어있는데 상급자 코스의 경우 각 종목의 거리는 수영 1km, 사이클 20km와 러닝 10km. 내가 이 축제를 알게 된 건 지난 수요일이 되어서야였고, 그때는 사전예매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현장접수에 대한 정보는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따로 안내되어있지 않길래 문의 댓글을 달았다. 사전예매가 끝났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한강 횡단. 상급자 코스의 1km 수영은 바로 잠실에서 뚝섬 쪽으로 한강을 건너는 한강 횡단 수영이었다! 수요일에 축제를 알게 되며 그러한 수영 코스를 보았을 때, 내 심장은 마치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처럼 뛰었다. 전에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한강 수영 횡단이 그 즉시 버킷리스트에 올랐고, 그걸 혼자 실행할 깡은 안 되니 이번 축제에 꼭 참여해야만 했다. 현장접수에 대한 안내의 부재는 높은 확률로 그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의미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문의 댓글을 달았다. 돌아온 답변은 놀랍게도 긍정적이었다. 사전예매 인원인 1만 명보다는 훨씬 적지만 축제가 진행되는 토·일요일 양일간 각 300명씩 현장접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상급자 코스는 일요일 아침에만 열렸기 때문에 한강을 횡단하려면 일요일 아침 9시부터 접수를 받는 300명 안에 들어야 했다. 난 그럴 각오가 되어있었다. 밤에 수영복과 래쉬가드, 수영모, 수경, 자전거 헬멧, 에너지바 등등을 모두 챙기고 아침 여섯 시에 알람을 맞춘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에 들기 전 인스타그램 피드를 멍하니 내리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게시물을 보고 말았다. 토요일에 이미 티켓 한정수량이 소진된 데다가 인파우려로 인하여 일요일에는 수영 현장 접수를 받지 않는다는 것. 자정 즈음에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괜히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헛수고하지 않게 되었으니 자정에라도 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러나 주최측이 이렇게 말을 휙휙 바꾸는만큼 내일 아침에 이 공지도 취소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또 품고..! 알람을 취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어나는 데에는 알람도 필요하지 않았다. 4시 55분이 되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야속하게도 공지는 그대로였다. 일단 찾아가서 전날까지 안내했던 걸 당일 밤에 뒤집는 게 어디있냐고, 난 게시물을 못 보고 왔다고 우겨볼 생각도 했으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결국 단념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원치 않았던 여유 속에 아침을 먹고 오늘 대신 무얼 할지를 정했다. 미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 메모장에 쟁여두었던, 가고 싶던 전시는 다음의 다섯 곳이었다: 《윤협: 녹턴시티》 — 롯데뮤지엄, ~05/26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 일민미술관, ~06/23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 + 파트너스》 — 서울시립미술관, ~07/21 《새벽부터 황혼까지: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 마이아트뮤지엄, ~08/25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09/22 이중 녹턴시티 전은 종료되었고 정영선 전은 이미 갔다 왔다. 남은 세 개의 전시 중 포에버리즘 전은 도슨트 프로그램이 금요일과 일요일 이렇게 매주 두 번밖에 없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니 여기로 가보기로 했다. 이 전시는 포스터 때문에 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 스토리로 올라왔던 일민미술관 외벽 사진에서 포스터를 처음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그리움에 관한 전시라는 걸 소개에서 읽기 전부터 나는 포스터에서 본능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논리적으로 뜯어보자면 행복한 기억을 의미하는 클리셰와도 같은 해변가의 저녁 노을에, 과거로 향하는 문을 형상화한 듯한 합성기법이 합쳐진 결과라고나 할까.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이다. 책자도 이렇게 생겼어 포스터를 보고 충동적으로 관람을 결심한 탓에 소개는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그만큼 본 전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대한 각오도 하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충분히 즐겁게 보고 나왔다. 시간에 맞추어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며 일단 빠르게 쭉 한번 훑은 것도 즐거운 관람에 한몫 한 듯. 아래는 내가 인상깊게 본 작품들이다. LLM is everywhere. 너도 GPT에 RAG 붙여서 탄생했니? 차지량,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길 잃은 새들(10:04)〉 아이맥의 디자인과 색감, 화면 속 이미지 그리고 책상에 래핑된 해질녘 풍경에 iridescent 효과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마치 하나의 보석 같았다. 아니 웬만한 보석보다 더 예뻤다. <img src="https
2년 전 · #수필
가끔 일어나는 특별한 경험.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이라서 어디에 물어보거나 찾아보기도 전에 까먹는 것들. 그런 것들이 몇 개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까먹고 지나가지만, 정말 가끔씩 잊어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성공하거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다루는 자료를 찾아냈을 때. 나아가 그들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학술 용어로까지 정의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대단한 희열을 느낀다. 아래는 내가 그렇게 발견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발생 빈도가 낮거나 내게 개인적인 의미가 클수록 뒤쪽에 가도록 정렬해놓았다. 이 글의 초안을 완성한 이후에도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것들을 아래 목록에 계속 추가해나갈 것이다. 지난 5월에 정리를 시작한 글감을 지금(2024년 12월 16일)에야 이 글로서 본격적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후술할 특정 상황을 바더-마인호프 현상이라고 부른다는 걸 방금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기시감(데자뷰)과 같은 별의별 심리 현상들이 다 떠오르는데, 이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은 글에서 배제하겠다. ‼️ 이 글과 관련된 설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고 시간이 남으신다면 아래 링크에서 설문에 참여해주세요! 🔗 설문조사 링크 목차 크로노스타시스 안내섬광 멀티플렉스 디스플레이 붕괴 의미 포화 빛 재채기 증후군 바더-마인호프 현상 그 외 목록 크로노스타시스 Chronostasis, a.k.a. Stopped-Clock Illusion 뇌가 새로운 사건을 인식하거나 새로운 작업을 요청받을 때 그것의 첫번째 작용이 시간 상에서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 어릴 때, 다른 걸 보고 있다가 갑자기 시계를 보면 초침이 잠깐 멈춘 듯 했다. 연속 초침 무브먼트 시계가 아닌 이상 초침은 물론 멈춰있다 점프하지만, 그 멈추어있는 시간이 일시적으로 길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다음 초들은 정상적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내 시선에 놀라 시계가 잠시 얼어붙은 건 아닐까?! 하는, 당시에도 스스로 시답잖게 여겼던 상상을 함께 하곤 했다. "새로운 감각의 인식 → 시간이 지연되는 듯한 느낌"이라는 인과관계만 유지한 채 현상을 보편적인 감각에 대해 일반화한 것을 chronostasis라고 부르고, 실제로 청각이나 촉각 영역에서도 이것이 발생한다고 한다. 다만 이 현상을 대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례가 시계 초침이었던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닌지, 위키백과에서도 chronostasis의 대표적인 예로 "멈춘 시계 착각(stopped-clock illusion)"을 들고 있다. 현상을 일으키는 기작은 좀 복잡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같이 보기 Chronostasis (위키백과 문서) 안내섬광 Phosphene 망막에 빛 이외의 물리적인 부적당자극이 작용할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빛의 감각.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어떤 점들이 흩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점들이 무슨 색인지는 확실치 않다. 빨간색이었지만 파란색인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초록색이다. 눈에 압력을 가할 때 점들은 많아진다. 눈이 뻐근해서 눈두덩을 누를 때라든지, 팔뚝으로 눈두덩을 압박하며 책상에 엎드려있을 때라든지. 어둠 속에서의 시선에 따라 점들은 파도처럼 밀려나는 듯하기도 하다. 어릴 때는 이 점들이 마치 우주 공간의 별들을 보는 것 같아, 일부러 눈두덩을 누르며 우주여행을 하는 듯한 경험을 즐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내섬광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눈에 가해지는 압력이 시각세포에 마치 빛처럼 자극을 일으켜 무언가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아래 자료들에 잘 설명되어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것도 내 경험을 충분히 잘 대변하지는 못한다. 나의 경험의 핵심은 어떤 점이나 얼룩 같은 것들이 불규칙하게 분포해있다 그들의 색은 바뀌고 있거나 정확히 식별하기 어렵다 그들은 시선에 따라 느리게 밀려나고 밀려온다 는 것이다. 여유가 생기면 내가 직접 시각화 자료를 만들어보고 싶다. *주제와 다소 벗어나는 잡소리 취중 시각 시각화: USAG Stuttgart's View from Drunk Goggles (ssri+dxm audio+visual) waking up with serotonin syndrome after drinking 2 bottles of cough syrup --> 같이 보기 Phosphene (위키백과 문서) 눈 감고 눈꺼풀 누르면 보이는 섬광들은 뭘까? (유튜브 영상) Phosphenes: What You See Behind Closed Eyes (유튜브 영상) 팔에 눈박고 엎드리면 보이는 세계 (인스타그램 게시물) 멀티플렉스 디스플레이 붕괴 Multiplexed Display Break-up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 등에 표시된 글자를 보며 무언가를 씹을 때 글자가 요동치는 현상. 이건 어디에 정식으로 정의되어있는 용어는 아니고 위키백과에서의 묘사를 내가 명칭으로써 차용한 것이다. 위의 설명 그대로, 무언가를 씹으며 전광판을 보면 글자가 춤추듯이 요동친다. 그러나 모든 화면의 글자가 그런 것은 아니고, 7-세그먼트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전광판 위의 것만 그렇게 보인다.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 이런 전광판들 위의 글자는 사실은 특정 시간에 한 전구(세그먼트)만이 발광한다. 글자가 온전해보이는 것은 우리 시각의 잔상 효과 때문이다. 이렇게 작동하는 디스플레이를 multiplexed display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씹어서 우리의 시점에 순간적인 변화가 생기면, 한 글자 안에서도 세그먼트들의 정렬이 깨져 글자가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위키백과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같이 보기 Multiplexed display (위키백과 문서) - "Break up" 섹션 의미 포화 Semantic Satiation 단어나 문구의 반복이 일시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잃도록 하는 현상. 위키백과 문서는 청각적인 반복을 위주로 작성되어있는데, 나는 청각으로는 이를 경험한 적이 없고 오직 시각으로만 경험했다. 내가 읽거나 쓰고 있던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그 단어의 뜻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르게 낯설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경우에 자주 발생했지만 꼭
2년 전 · #수필

봄철에 결혼하는 건 비단 사람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개미들도 5월 중순 정도가 되면 날씨가 맑은 날을 잡아 결혼비행을 한다. 종류에 따라 시기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왕개미의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일본왕개미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선유도공원에 이맘때쯤 찾아가면 날개달린 개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요일인 오늘 문득 선유도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이번주는 회사가 통으로 쉬어가서 출근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알기라도 하는지 언젠가는 일어날 예정이었던 개인적인 일들이 이번주에 몰려서 터지는 바람에 평소보다도 훨씬 더 바쁜 한 주를 보냈다. 금요일부로 그 일들은 마무리되었고 토요일인 어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지만 그동안 쌓인 피로를 푸는 데에 하루를 더 써야만 했다. 그리하여 휴일다운 휴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여유가 오늘에야 오랜만에 주어진 것이다. 그것도 저녁에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만이지만. 맞다, 오는 5월 27일부터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게 됐다. 앞으로도 부산에 간간이 출장은 가겠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오는 주까지로서 일단 마무리된다. 이렇게 따뜻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자유 시간에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디든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지금쯤이면 개미들 결혼비행 시즌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선유도공원을 목적지로 정했다. ⋮ 사실 나는 개미의 생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꽤나 특이한 취향이라 어디 가서 굳이 자세히 말은 안 하지만. 집이 침략을 당하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알부터 챙기는 그들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내 호기심을 돋우었다. 미국에 그랜드캐니언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보라는 협곡은 안 보고 개미만 보고 있었다는 건 지금도 부모님이 나를 놀리는 주제다. 어릴 때 개미집 한번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의 경우에는 나이가 들면서도 그 흥미가 지속, 오히려 확장되어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고 공부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런 확장에는 확실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 소설 「개미」가 한몫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의 추천으로 베르나르의 소설에 입문하게 된 내가 마침내 「개미」를 읽게 된 것은 중학교 1~2학년 즈음이라고 기억한다(그런 나는 수년 뒤 그의 고향에서 그를 직접 만나게 된다 !). 방대한 양과 갈수록 철학적이어지는 내용 때문에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완독은 못 했지만, 개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건 1, 2권만으로도 충분했다. 하굣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도 특이한 개미 집단의 모습이 보이면 멈춰서서 한참을 구경했다. 일개미와는 다르게 우락부락하게 생긴 병정개미, 안테나를 정리하며 자세를 가다듬는 개미, 거대한 왕개미를 마주친 불개미 등등. 운이 좋게 날개 달린 개미를 처음 봤을 땐 정말 뛸 듯이 기뻤다! 공주개미였는지 수개미였는지 둘 다였는지가 입구에서 모여 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또 한참을 보다가 수학학원으로 부랴부랴 자전거를 탔었다. 학원이 끝나자마자 똑같은 자리를 찾아갔는데 이미 해가 져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때쯤이었을까, 개미를 제대로, 직접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그 퍼런 젤리가 담긴 통 에 일개미 몇 마리 잡아넣는 식이 아니라, 여왕개미가 있어서 지속하고 확장할 수 있는 진정한 군체를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보았던 책과 인터넷 카페에는 개미의 군체가 형성되는 과정이 상세히 나와있었다. 공주개미는 결혼비행을 마치고 날개를 떨군 뒤 여왕개미가 되고, 알을 낳은 후에는 그것이 첫번째 일개미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보살피며, 그렇게 탄생한 일개미와 함께 수백만에 이르는 군체로 커가는 것이었다. 그 모든 과정은 마치 건국신화와도 같았다! 신화와 같은 그런 장면을 목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4년 1월에 가입했던 <'개미' 알면 사랑한다> 네이버 카페 결혼비행 시기를 공부하고 때를 기다렸다. 정확히 10년 전, 2014년 5월에 중학교 3학년의 나는 이쯤이겠다 싶어 개미가 많이 보이던 선유도공원을 찾아갔다. 결혼비행은 군체마다 1년에 겨우 한번 정도 있는 행사이므로, 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세상이 내 소원을 듣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정말로 여왕개미가, 그것도 여러마리가 있었다! 감격하며 들고온 플라스틱 통에 이들을 주워담고 부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뭔가 이상했다. 적당한 크기의 집에 수분까지 알맞게 제공해주었으니 이제 알을 낳아야 하는데, 잡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기별이 없었다. 무엇보다 결혼비행이 끝난 여왕개미라면 날개를 떼었어야 하는데 날개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었다. 그때에 와서야 생각했다: 이 개미들은 날개를 아직 떼지 않은 여왕개미가 아니라 애초에 결혼비행을 하지 않은 공주개미일 수도 있겠구나. 그 추측이 맞았을 거다. 그들은 결국 하나도 알을 낳지 못했다. 날개를 떨군 여왕개미만을 잡아야겠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며 내 첫번째 시도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고등학교 입시 시즌이었다. 모교인 하나고등학교에 지원할 때 자기소개서를 써야했는데 내 자소서는 다름아닌 개미로 시작했다. 자소서의 뼈대를 구상하며 지난 3년간의 내 행적을 되돌아보는데, 개미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여 채집까지 한 과정이 탐구에 대한 내 열의와 자율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가서 개미 잡아와."하는 부모가 많지는 않을 것 아닌가? 최초공개 이건희의 하나고 자소서 개미와 관련한 예상 질문까지 뽑아가며 열심히 면접을 준비했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하나도 물어보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다행히 전형에 합격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기숙사학교로 학생들은 달에 한번씩밖에 귀가하지 않아 학교 안에서 개미집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개미를 채집하기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사실 안에서는 하루하루 사는 게 바빠서 그럴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아, 여름방학 중에 집에 있을 때 동네 뒷산으로 한번 채집을 떠난 적은 있다. 그때는 결혼비행 시즌이 아니니 여왕개미를 채집하려면 바위를 들추거나 통나무를 비틀어 열어보아야 했다. 채집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만 통나무 속을 휘젓는 붓*에 병정개미들이 쏘아대던 개미산 냄새는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모기든 개미든 산에 사는 애들이 더 사나운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손이나 핀셋으로 개미를 잡으려고 하다가는 개미가 다치기 쉽기 때문에 붓을 사용하곤 한다. 채집이 어려운 환경은 개미에 대한 내 열정을 다른 형태로 표출하게끔 만들었다.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며 벌이 개미와 같은 진사회성 동물의 부류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만큼 벌도 복잡한 사회 구조와 생태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한 단계 더 나아가, 먹이의 위치를 전달하는 소통 규칙(=8자춤)까지 갖추고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벌들의 특성은 또 한번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쪽, 진사회성 동물로 주제를 잡아 여러 과제를 수행하곤 했다. 1학년 때는 벌의 춤과 이를 연구하여 노벨상을 받았던 학자의 삶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한 에세이 대회에 출품했다. 3학년 때, 수강생별로 생명과학 안의 주제를 잡아 관련 논문을 읽고 소개해야 했던 방과후수업에서는 아예 개인 주제를 동물행동학으로 잡고 개미와 벌의 행동 양식에 관한 논문을 다수 읽고 소개했다. 그때 읽었던 논문 목록: A systems approach to animal communication The role of multiple pheromones in food recruitment by ants Sibling conflict and dishonest signaling in birds The Drosophila pheromone cVA activates a sexually dimorphic neural circuit The mixed-species chorus as public information: Túngara frogs eavesdrop on a heterospecific Hydrocarbons Emitted by Waggle-Dancing Honey Bees Increase Forager Recruitment
2년 전

'재화'에 대해 요즘 내가 가진 생각들을 앞으로 몇 개의 글로써 풀어보고자 한다. 이건 그 시리즈의 첫 글이다. *** 지난 1월부터 회사에 다니고 있다.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액셀러레이터 회사다. 지난해 말 창업 아이템의 투자 유치 목적으로 처음 접촉했다가 인연이 이어져 입사까지 하게 됐다. 사내에서 나는 회사의 주 업무, 그러니까 투자 심사와 사후 관리 등을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그런 업무를 일부 자동화하고 보조함으로써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도구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을 한다. 내 지난 경험들과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몰랐던 투자 프로세스를 새로이 알아가자는 것이 입사 당시의 내 의도였고 그게 꽤나 맞아떨어진 덕에 일은 재미있다. 하지만 동시에 단점도 분명 존재하는데, 사내에서는 연구개발 인력이 나뿐이다보니 기술적인 의견을 교환할 사람이 없어 외롭고, 또 그런 의견교환을 통해 더 빠른 성장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풀타임으로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지난 인생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씀씀이도 덩달아 커졌는데 절대적으로 대단한 수치를 찍은 건 아니고 작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사실 작년에 창업을 시도한답시고 변변한 벌이 없이 한 해를 통으로 보내면서 내 소비 심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축되어있었다. 소비 심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절대적인 은행 잔고보다는 지금 들어오고 나가는 순수입/지출이더라.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버는 건 없이 쓰는 족족 마이너스니 정말 지난해말에는 나가서 밥 한끼 사먹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안정적인 수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 심리는 금세 회복됐다. 더불어 최근에는 더 다양한 소비재에 관심이 생겨(이건 재화 시리즈의 이어지는 글에서 상술할 것이다) 돈이 나갈 구멍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회사에 묶여있는 시간 동안은 소비가 제한되고 또 충동적으로 소비하는 종류의 사람도 아니다 보니 지출은 아직 적당한 범위에 머물러있다고 (스스로는)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 ext{태어난 이래 최대 수입}) - ( ext{그만큼 늘어나지는 않은 지출})$$ $$ = ( ext{태어난 이래 최대 저축})$$ 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다보니 자산 관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성인이 되어 자산을 자주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이래로 항상 내 포트폴리오에서는 예금·적금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이외에는 주식과 펀드를 각각 몇 달 정도씩 시도해봤던 게 다이니 예·적금이 거의 전부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주식을 하던 중에는 거기에 자산의 절반 가까이가 들어가있던 때도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 회복장에서 평가금을 조금 불리며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있다가 하락장에서 두드려맞고 약간의 합산 순손해를 보며 전량을 매도하고 끝냈었다. 멋모르고 들어갈 판이 아니라는 걸 적당한 교육비를 내고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는 모든 예수금을 다시 돌려서 예금으로 예치하고 있다. 그리고 수입이 들어오면 단지 그중 최대한 많이, 최대한 빨리 최대한 금리가 높은 예금에 넣는 것만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다음 수입은 언제이며 그때까지 나는 얼마를 쓸까, 그럼 지금 얼마까지 넣을 수 있을까를 추산해보면서. 많은 예금에 긴급출금 기능이 생기고 최근에는 개인 신용카드도 발급받으면서 그 고민은 많이 줄기는 했는데. 이번에 K패스 되는 걸로 현대카드를 재발급받았는데… 너무… 못생겼어… 애플페이 아니었으면 탈주했다 +고 생각했는데 쓰다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세상에 저축을 하는 방법이 예금에 예치하는 것밖에 없다면 이보다 좋은 방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금리 상승은 멈췄으며, 자산이 늘어남은 서로 다른 수익률로 인한 수익 차이 또한 커짐을 의미하므로 예금이 아닌 더 고수익률의 무언가도 함께 들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또 무턱대고 주식을 시작할 수는 없고, 따로 공부를 한다 해도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튜브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썸네일을 보게 되었으니… 이하 모든 썸네일 클릭하면 영상으로 이어집니다. '어? x될순 없지.'라는 생각과 함께 홀린 듯이 들어가 영상을 시청했다. 상당히 긴 길이임에도 한번에 다 보았고, (다분히 의도되었겠지만) 훨씬 위안이 되는 제목의 다음 화, 그리고 훨씬 이전에 업로드되었던 관련 영상까지도 열심히 시청했다: 도합 한 시간이 넘는 영상들을 모두 보고 내가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투자에 대한 지속적인 학습와 실행의 필요성에 대한 환기. 스포 아닌 스포를 하자면, 영상에서 자산을 100%의 확률로 압도적으로 불릴 수 있는 마법은 소개되지 않는다. 단지 가장 많은 돈을 가장 빠르게 넣어 복리의 효과를 최대한 누리고, 분산투자를 통해 원금 손실의 위험을 줄이라는 조언뿐. 조언이라고 하기도 뭐한게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전자는 내가 예·적금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던 행동강령과도 일치한다. 하지만 성인쯤 된 사람에게 대부분의 문제의 해결은 인지보다는 실천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영상은 그 실천을 이끌어낼만한 좋은 촉진제인 것이다. 둘째, 약간의 지식 습득과 앞으로의 학습 방향 설정. 과거의 나는 분산투자를 정말 유명한 격언 그대로 여러 계란 바구니, 그러니까 다수의 상품에 자산을 배분하라는 정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자산을 섞어 수익률은 비슷하게 유지하며 위험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영상을 보며 그 개념을 조금 더 구체화했으며, 이걸 포트폴리오 이론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론을 적용한 간단한 예시도 따라가보았다. 이론의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 이를 더 깊게 공부하고, 더 많은 예시를 찾아볼 수도 있게 되었다. 당장 유튜브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MIT OpenCourseWare의 <포트폴리오 관리> 강의 가 피드에 뜬다. 너무나 유용했다. 이 시리즈에 깊은 감명을 받아 다른 강의들도 마저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열 개 좀 안 되게 본 것 같은데 하나하나 주제 선정이 너무나 훌륭하다. 주택청약과 금리, 국민연금 개혁, 고물가의 원인이 되는 산업구조 분석 등등. 이 시대와 나이에 알아야 할 것, 주시하고 있어야할 것, 실천해야 할 것 그리고 고등학생 때 경제 수업을 들으면서 '이런 건 왜 교육과정에 없지?'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느낌이다. 특히 가장 최근에, 연말정산에 관한 영상이 올라왔을 때는 정말 감동받았다. 소득세 신고의 달에 맞추어 기획한 영상인 듯한데, 바로 작년 이맘때에 2년 동안 미루어두었던 소득세를 신고하며 아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근로소득 사업소득 기타소득 등 다양한 소득 종류와 각종 공제, 이 모두를 아우르는 몇 십 개에 달하는 신고서 항목들을 들여다보면서 진짜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깨먹지는 않고 많은 걸 배우면서 같은 상황의 친구들을 돕기도 했었다. 나도, 친구들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걸 설명해주는 과외 선생님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마냥 이 영상이 올라온 것이다. 아직 본 영상을 보지는 못했다. 영상 업로드 주기가 짧아서 연말정산 이전에도 아직 볼 영상들이 산재해있다. 이렇게 유익한 콘텐츠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슈카월드에게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하나의 사업체로서 수익도 잘 내고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큰 사회적인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나는 슈카월드로부터 마치 성심당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슈카월드 코믹스를 보며 느낀 깊은 감동을 기록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여러분도 영상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정말 강력 추천한다. 영상 대부분의 조회수가 100만에 근접 또는 상회하니 이미 본 이들도 꽤 많을 거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위의 '지금 안하면 x되는 거야' 영상부터 바로 시작해보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내 미래의 배우자는 이런 자료를 보고 배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면 좋겠다, 라고까지 생각했다. 배움의 기쁨을 공유하고, 각자가 모르던 지식이 있다면 서로 채워주며, 배운 것을 통해 미래의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갈 방안에 대해 건설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다. 하지만 일단 배우자는 둘째 치고 연인부터…
2년 전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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