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저녁에 세종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르고 왔다. 맨날 책상 앞에 앉아 학위논문 마무리 작업에 치이던 중 오랜만에 떠난 나들이라 정신이 환기되었는지, 오가는 차 안에서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라 적어본다. 제목은 내가 태어난 지 오늘로 27년 2개월 7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의도한 게 아닌데 숫자도 참 예쁘다. 생각을 꼭 오늘 중에 글로 옮기라는 뜻인가 보다. 내 인생의 이 시점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이전에도 이미 나이를 먹어가며 새롭게 느낀 점들을 글로 적은 바 있다. 그것은 내 입장, 즉 내가 얼마나 부딪히고 읽고 생각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다루었다. 하지만 본 글은 좀 다르다. 오늘은 내가 포착한, 내 또래가 지나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이 세대의 컨센서스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개개인의 편차를 서로 상쇄한 "대푯값"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내 나이 자체가 아주 적절한 제목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간간이 이렇게 인생 버전 업데이트 이력을 쓰는 것도 재밌겠다. 세대의 컨센서스라고 했지만 나의 관측가능한 우주는 몹시 작으므로 실제 ground-truth와는 아주 다를 수 있음을 미리 일러둔다. 어쩌면 이 글이 내가 경험하는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v27.2.7 업데이트 많은 또래가 스스로 가구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가족과 활동하는 지역이 같고, 분가하기에는 도시의 혹독한 집값으로 그 비용이 터무니없이 높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가끔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한다. 이제 마감 시간이 늦는 카페/술집을 찾으며 전전긍긍할 일이 많이 줄었다. 몇은 차가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가끔은 택시를 탈 재력이 있어, 막차 시간에 대한 고민도 덜었다. 결혼한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보다는 빨라서 슬슬 사례가 보이는데, 그마저도 많지 않다. 그러나 머지않아 (= 앞으로 1-2년 안에도) 크게 증가할 듯싶다. 얼마 전에 만난 나보다 불과 몇 살 많은 사람이, 주변 친구 중 절반은 결혼한 것 같다고 말해 사실 좀 놀랐다. 여자도 아닌 남자였는데. 아무리 결혼 연령이 늦어졌다고 해도 파도는 오는구나. 결혼이 그러하니 출산과 육아의 파도도 곧 뒤따라올 것이다. 맏이가 아니라면 그 파도에 이미 탑승한 손윗 형제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조용한 장소를 선호하는 나로서 친구들과 집에 모여 늦저녁까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내 인생 중 독립성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나 포함)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이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길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독립을 가능케 하는 재력 수준은 갖추었지만 동시에 아직 산하의 가족은 없어 찾아오는 잠깐의 황금기일 뿐이다. 가정을 꾸리려면 자신의 세계가 배우자와 자식의 그것과 병합되며 수반하는, 그 황금기를 반납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개인별 적성의 차이는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초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여기에 두각을 나타내는구나.', 정도의 생각이 들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위에 어느새 무시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이 쌓여, 이제는 각자가 활동하는 분야에 따라 아예 다른 종 species 으로 분화해 버렸다. 그만큼 삶의 양상이 달라졌고, 다른 종의 사람과 교류하려면 특별한 노력을 들여야 한다. 예체능 분야에서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커리어 상으로 시작보다 끝에 가까운 경우도 꽤 많다. 많은 이들의 전성기가 시작되거나 이미 진행 중이고 바둑 기사나 프로게이머와 같은 특정 분야들은 이미 전성기를 지났다. 나와 내 주변 많은 경우를 포함한 학계, 전문직종, 창업씬 등에 속한 사람들의 번영은 예체능 사람들의 그것보다 늦다. 그중 확정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은 아직 내 주변에는 없다시피 하며 일반 사회로 눈을 돌려도 그 수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럴 확률이 높은 이들은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내 안목이 얼마나 쓸만했는지 5년, 10년 뒤에 따져볼 일이 아주 기대된다. 재계, 정계 사람들의 시기는 앞선 항목의 그것보다도 늦어, 일반 사회에서도 입문한 또래조차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삶의 막바지도 이제 막연히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부모는 이미 은퇴를 했거나 곧 앞두고 있고,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하루하루 더 명확해진다. 막 세상을 떠났다는 유명인들의 이름 중 많은 수가 이미 알던 이름이다.
3달 전 · #수필
얼마 전에 아버지 생신을 맞아 부모님께 핸드폰을 선물해 드렸다. 선물이란 게 모름지기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받으면 좋아할 물건이어야 하는 건데, 부모님께 새 핸드폰이 꼭 필요한지는 이미 좀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두 분의 핸드폰 모두 예전부터 오늘내일하는 중이었지만 당신들께서는 사용에 아무 지장이 없다고 해오셨기에… 아무튼 선물을 받고 아주 좋아하시기는 했다. 아버지 생신이 연말이라 크리스마스 때와 시기가 비슷한데,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지도 이번 해로 딱 20년이 되었다. 2005년 크리스마스에 난 산타할아버지께 전자사전을 선물로 받았다. 내가 소유하게 된 첫 전자제품이었다. 주사율이 3Hz 될까 말까 한 흑백 반사형 LCD에 변변한 기능이라곤 사전과 메모, 달력, 연락처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걸 받았을 때 느낀 설렘은 아마 첫 맥북이 생겼을 때보다도 컸을 거다. 며칠 동안 메뉴를 다 뒤져가며 메모에다가 일기도 써보고, 친구들 집 전화번호도 저장해두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피처폰을 썼기 때문에 개인 컴퓨터가 생긴 고등학교 재학 전까지 최소 10년은 이 사전을 옆에 끼고 살았다. 고등학생 때도 면학실에 두고 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많은 단어를 이 사전으로 배웠다. 지난주에 영어로 한 세미나 에서 사용한 단어 중에서도 이걸로 배운 것의 지분이 아마 반 이상은 될 거다. 지금 보니 정말 작고 귀여운 전자사전. 내 손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상·하판을 다 한 번씩 갈았다. 그야말로 테세우스의 전자사전 그 자체 그해 크리스마스는 배경도 독특했다. 삼촌네 집들이가 딱 그때로 잡힌지라 거기서 선물을 받았다. 어린 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삼촌 집을 어떻게 알았지??'하고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부모님께 산타할아버지께 듣기로는 그때 친척들과 일정을 조율하며 장소가 막 바뀌는 와중에 선물을 어떻게 수송해야 할지를 함께 계획하느라 고생을 좀 하셨다고 한다. 재밌는 건, 올해 나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위험을 부담하며 핸드폰을 바로 본가로 배송시킬지, 아니면 내 집으로 시키고 가지고 올라갈지 동생과 의논하면서 아 부모님께서도 2005년에 비슷한 대화를 나누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 20년 만에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물론 부모님께 의지하는 구석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제 적어도 가끔은 부모님께 선물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내가 컸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또 공교롭게도 전자사전과 스마트폰은 각각 당시를 대표하는 전자제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 기능과 성능의 차이로부터 정말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을 느꼈다. 풀고 싶은 즐거운 기억이 하나 더 있다. 2003년 연말에 우리 가족은 방콕으로 여행을 갔었다. 자연스레 크리스마스 선물도 여행 중에 받았다. 그해 선물은 요술칠판으로, 옆에 레버를 내리면 탄성으로 레버가 다시 느리게 올라가며 한 번에 캔버스 전체를 지워주는, 꽤 고급(?) 요술칠판이었다. 거기에 원하는 그림도 그리고, 무언가를 배울 때 적어보기도 하면서 한참을 잘 썼다. 그런데 선물을 받던 그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물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온 편지였다. 편지가 태국어로 한바닥 쓰여 있던 것이다! 외국 국적의 산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positive). 그리고 이런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다 있느냐면서 부모님께 아마 자랑했을 거다. 겨우 다섯 살 때 일이 지금도 드문드문 기억나는 걸 보면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편지는 사실 부모님께서 영문으로 쓰고 호텔 직원에게 부탁해서 태국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날 그 편지와 선물을 받은 사건은 지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기억 중 하나다. 나도 나중에 아들딸들에게 이런, 아니면 더 기발한 선물을 해야지. 선물의 재미있는 점은, 정성을 들이는 건 선물을 줄 때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는 건 오히려 받은 선물들이라는 거다. 내가 선물하지 않고 살아온 것도 아닌데, 떠오르는 건 모두 받은 것들이다. 그리고 주는 입장에서는 내가 준비한 걸 마음에 들어 할까 노심초사하지만, 받을 때는 그게 뭐든 상관없다. 그냥 날 생각하며 무언가를 준비해 주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맙다. 얼마 전에는 인형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전에 인형에 아무 관심이 없던 나였음에도 그게 무척 마음에 들어 집 소파 등받이 위에다가 잘 올려두었다. 잘 모르던 것을 선물 받으면 그게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2012년 생일에 나한테 펜텔 샤프 선물해 준 초등학교 친구들아, 나 그거 아직도 쓰고 있는 거 아니? 마음에 쏙 들어서 중간에 몇 번 고장도 났는데 일부러 같은 걸로 두세 번 더 사서 쓰고 있어. 얼마 전에 양자컴퓨팅 과목 시험도 그걸로 봤다. 요즘은 카톡에서 보고 챙기기가 쉬워져서 그런가, 생일과 같이 정형화된 때보다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받는 선물이 주는 울림이 더 커진 것 같다. 얼마 전에 받은 인형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그건 연구실 선배가 해외 학회에 가서 사 온 거였다. 나도 함께 가려고 초록 제출해서 accept 받고 논문까지 작성 완료, 이제 출국만 앞둔 학회였지만, 어이없는 사정이 생겨서 갈 수가 없게 됐다. 입학 후 따낸 첫 해외 학회를 눈앞에 두고 못 간 나를 떠올리고 인형을 사다 준 건데, 그 성의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시드니에서 열린 항공우주학회라 우주복 입은 캥거루 인형이야 자기 인생 하나 꾸려나가기에도 바쁜 세상에, 생일도 아닌 사람을 챙길 줄 아는 게 다 센스고 노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떠올리니 새삼 마음이 따뜻해지는 연말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더 노력해야지.
9달 전 · #수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 말을 요새 자주 떠올린다. 이름을 남기고 싶다. 나를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들에게는 덕성이 훌륭했던 사람으로, 모르던 이들에게는 세상을 이롭게 한 공학자·기업가·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다. 동시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이 땅을 거쳐간 천몇억의 인간 중 당신이 이름을 기억하는 자는 몇이나 되는가. 얼마전, 문득 요절한 가수의 노래에 빠져 며칠 동안 그것만 들은 일이 있었다. 그 가수는 결혼을 한 적이 없고 자녀도 없었다.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어떤 개체의 가장 큰 성공은 자신의 유전자 혹은 그것과 유사한 것을 세상에 아주 많이 남기는 것이다. 반대로 자손을 남기지 못한 개체는 실패한 개체다.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그 가수는 실패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그가 세상을 뜬지 꽤 된 이 시점에도 그의 노래를 듣는다. 그의 창작물은 그가 죽은 후에도 남아 수많은 이들에게 소비된다. 우리는 그의 노래로 위로받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름을 남긴다"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나와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 또한 고차원적인 관점에서는 나의 유전자를 남기는 방법 중 하나다. 직접 생식하는 일만큼 정밀한 복사는 아니어도, 훨씬 더 많은 개체로서, 영원히 남길 수 있다. 이제 생식은 유전자를 남기는 많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현대 국가들이 변모하는 모습에서도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최종적인 형태는 같은 인종이 아닌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인종으로 그어지던 국가 간의 경계는 세계화로 인해 희미해지고, 이제 사상과 이념이 사람들을 한데 묶는다. In God We Trust, 미국은 그 독특한 배경으로 인해 이 궁극의 형태에 가장 먼저 다가선 나라가 되었다. 가치관을 통한 결속은 때로는 피로 쓰여진 그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람들이 인종은 다르지만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편을 먹고, 같은 인종의 사람과 맞서고, 심지어 총을 겨누는 광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유전자의 보존을 제1법칙으로 하는 진화생물학만으로는 이러한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 아니면 유전학 연구가 언젠가 극에 달하면, 염기서열에 담기기에는 너무나도 추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가치체계가 알고보니 DNA에 광범위한 패턴으로서 새겨져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내가 지지하는 이념의 집단이 번성하는 것도 내가 아들딸을 낳는 것만큼 정말로 생물학적으로 성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0달 전 · #수필
여기 파일 탐색기가 로드됩니다. 탐색기가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다면 페이지를 새로고침해보세요. 어릴 때 TV를 보다 보면 종종 자료화면으로 교수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뉴스에서 "날이 추워지니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세요."라든가, 스펀지에서 "네 사실입니다. 소설 <죠스>는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될 때 <아가리>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처럼 이 대답을 꼭 교수한테까지 가서 들어야만 했을까 싶은 경우가 많았지만, 제작진은 답변뿐만 아니라 교수라는 자리가 뒷받침하는 그 답변에 대한 신빙성까지 인터뷰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교수들의 배경에 있던 책이 가득찬 서재는 그 신빙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그 서재를 보면서 나는 '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서재를 가지게 될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이러고 있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 나는 어른은 됐지만 여전히 그런 서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책 몇 권과 직접 인쇄한 몇 개의 종이 뭉치가 연구실 내 자리에 있는 자료의 전부다. 이렇게 단촐한 사무 공간의 구성은 연구자로서의 내 경력이 짧아서만은 아니다. 우리 학교에서만 15년을 보내신 나의 지도교수님께서도 과거 방송에서 보던 교수들의 서재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수의 책을 책장에 두고 계신다. 오늘(2025.11.30.)자 나의 연구실 자리 사무 공간의 간소화에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오히려 자료의 디지털화인 것 같다. 현대의 우리는 태반의 자료를 컴퓨터로 다룬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렇듯 나는 디스플레이와 키보드로 읽고 쓰는 일이 종이와 펜으로 그러는 일보다 월등히 많다. 여러분도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드라이브에 쌓여가는 자료의 양이 점차 많아지면서, 이들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하기 위한 체계가 꼭 필요했다. 이 체계는 내 개인 컴퓨터가 생긴 고등학교 즈음부터 시작해 계속 발전되어왔고 이제 상당히 안정적인 상태에 수렴해있다. 현대에 지식 노동을 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이런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나와 타인의 체계를 서로 들여다볼 기회는 많지 않다. 과거의 서재는 그 물리적인 존재가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지난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교수님들 배경에 있던 책들), 또 남의 노력으로부터 우연히 배우는 기회(어 이건 무슨 책이야?)가 되기도 했다. 서재의 디지털화는 우리로부터 이런 낭만을 많이 앗아갔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 디지털 서재를 능동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 상단에 있는 파일탐색기는 실제 내 아카이브 구조를 여러분이 직접 탐색해볼 수 있도록 구현한 것이고, 이어지는 내용은 그중 언급할만한 요소들을 설명한 것이다. 글 중 등장하는 이런 표현 은 그 아카이브 속의 구체적인 디렉토리/파일의 이름 혹은 경로를 뜻한다. ~ 는 내 홈 디렉토리( Macintosh HD/Users/gunheeyi )를 나타내는 축약어 이다. 이 글을 쓰던 어느날 밤 내 유튜브 알고리즘. 우연인가? 디렉토리 아카이브를 이루는 디렉토리(폴더) 중 주요한 것들. ~/iCloud Drive 자료들은 몇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iCloud에 저장된다. 나는 현재 네 대의 컴퓨터를 두고 위치/용도별로 바꾸어가면서 쓰는데, 이들과 태블릿, 휴대폰을 포함 모든 기기에서 연속적으로 작업하기 위해서는 클라우드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이전에 Windows PC + Galaxy 폰 조합을 쓰던 시절에는 Google Drive를 잘 사용했지만 애플 생태계로 넘어오면서 자료와 사진까지를 전부 iCloud로 옮겼다. 데스크톱/모바일 환경을 가리지 않고 모두 운영체제에 빌트인되어 별도의 설치 과정 없이도 잘 작동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앞서 언급한 클라우드 동기화의 예외로는 먼저 웹으로부터 다운로드하는 파일들이 있다. ~/Downloads 에 저장되는 이 파일들은 내용 확인 후에 장기 보관할 필요가 있을 경우 iCloud 아래 디렉토리로 옮겨지고, 그렇지 않을 경우 즉각적으로 혹은 주기적인 다운로드 폴더 정리 시 삭제된다. 또 하나의 예외는 이후 설명할 dev 디렉토리의 자료들이다. ~/iCloud Drive/yearly yearly 는 iCloud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디렉토리이다. 시간순으로 정리 가능한 거의 모든 자료가 여기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로 아래 구조로 2025 와 같은 연도가 이어진다. 자료의 분야별 구분은 각 연도 디렉토리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2024 아래에는 선보엔젤파트너스 (진학 전 다니던 회사), kaist (연구 및 코스웍), founders (연초 활동한 창업학회), freelancing (개발용역), misc (miscellaneous = 기타 잡다한 자료) 등의 하위 구조가 이어진다. 연도가 아닌 분야를 가장 큰 분류로 두는 design choice도 물론 가능했겠다. 하지만 언제 - 무엇을 한다는 순서로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더 자연스러웠고, 어떤 해에 내가 하고 있는/있던 일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아 나는 연도별로 분류하는 편을 택했다. 한 분야의 자료지만 기간의 중간에 해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다음 해에 이어지는 기간이 길지 않다면 그냥 주 연도인 첫 해에 모든 자료를 넣어버린다. 3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학년도(academic year), 첫 해 여름에 시작해 이듬해 1월에 마무리한 개발용역 등이 이에 포함된다. 여러 해에 유의미하게 걸친 자료의 경우 불가피하게 여러 연도 아래 같은 이름의 디렉토리를 둔다. ~/iCloud Drive/yearly/future yearly 아래 future 디렉토리를 만든 것은 가장 최근의 변화 중 하나다. 시간상 미래에 일어날 예정이지만 그 시기가 아직 불분명한(분명한 것은 future 가 아닌 구체적인 연도 아래 바로 담긴다) 일들에 관한 자료가 여기 위치한다. 구체적인 예로는 결혼, 육아, 박사후연구원, 취업, 가보지 않은 여행 등이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과거 기록 대신 위시리스트나 그때 가서 유용할 꿀팁, 지원 제도 등이 주를 이룬다. future 가 생긴 이상 yearly 를 chronological 로 바꾸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려나? ~/iCloud Drive/resources 남겨두어야 하지만 시간에 구애받지는 않는 자료들은 resources 에 담긴다. 책, 좋아하는 예술 작품, 악보, 연락처,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및 프로그램 환경 설정, 배경화면 이미지, 폰트, 문서 템플릿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iCloud Drive/tunnel tunnel 은 기기 간 자료 이동에 사용된다. 클라우드의 다른 디렉토리들은 자료를 "구름" 위에 올려두고 언제든지 내려받아 쓸 수 있게 한다면, tunnel 은 말그대로 지상에 존재하는 기기들 사이에 자료를 빠르게 공유할 수 있는 터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료는 이동하는 잠시 동안만 여기에 있다가 존속할 다른 위치로 곧 옮겨진다. 이 디렉토리도 내가 소유한 기기 개수가 급격히 늘어난 최근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간결하면서도 뜻을 완벽히 전달하는 tunnel 이라는 이름을 짓고 혼자 좀 뿌듯해했다. ~/dev dev 는 내 연구, 코스웍, 사이드프로젝트, 개발용역, 본 사이트 등을 위한 코드베이스를 모두 담고 있는 디렉토리다. dev 가 iCloud Drive 밖에 있는 것은, 이러한 소스코드들은 보통 iCloud와 같은 범용 클라우드 서비스가 아닌 "버전 관리 시스템"이라는 다른 소프트웨어(Version Control System, VCS)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코드를 작성하는 개발자라고 상상해보자. 만일 당신이 새로 작성한 코드가 어딘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면 멀쩡히 돌아가던 마지막 버전으로 롤백할 수 있는 기능이 아주 유용할 것이다. 또 각 버전에 추가/변경된 내용을 단어별로 들여다보거나, 여러 명의 병렬 작업으로 분기된 결과물을 검토 후 자동으로 합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일반 클라우드 서비스에서는 불가능한 이러한 기능들을 담은 소프트웨어가 바로 VCS다. 코드베이스의 백업 및 동기화도 VCS로 가능하다. *사실 이건 코드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자료이든 간에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단순 텍스트로 이루어진 코드에 비해서는 추가/변경의 기록이 *비단 코드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문서든 간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무척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세상이기는 한데, 거의 모든 것이 단순 텍스트로 이루어져 이력 관리가 쉽고, 모든 것을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개발자들이 이런 유토피아를 먼저 만들어버리고 말았을 뿐이다. git 소스코드가 110만 줄임 --> 게다가 코드베이스는 일반적인 클라우드로 동기화해서는 안 될 특성도 가지고 있다. 코드베이스에 속한 라이브러리(= 누군가가 이미 작성해놓아서 그대로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되는 코드 "밀키트") 중에는 그 안에 몇 백, 몇 천 개의 개별 파일을 담고 있는 것들이 있어서, 라이브러리 몇 개 갖다 쓰다보면 프로젝트에 속한 파일이 몇 만 개를 어렵지 않게 넘긴다. 이렇게 많은 수의 파일은 각각의 크기가 크지 않더라도 동기화 서비스에 대단한 부하로 작용한다. VCS에 익숙치 않던 주니어 개발자 시절에는 어수룩하게 코드베이스를 Google Drive에 두었다가 드라이브 클라이언트가 맛이 가서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VCS에서는 이런 요주의 파일들을 한번에 동기화 대상에서 제외해놓을 수 있다. 명명법 각 디렉토리/파일들은 다음 규칙에 따라 명명한다. kebab-case 디렉토리와 파일들은 기본적으로 영문 kebab case를 따라 이름을 붙인다. camelCase PascalCase snake_case kebab-case 여러가지 영문 표기법들 (개발자들이 진짜 쓰는 이름들이다) 이 선택은 순전히 컴퓨터공학적 관점에서의 편리함에 따른 것이다. ① 이름에 포함된 한글은 코드/명령어를 입력하는 도중 한글 ↔ 영문을 오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낳고, 인코딩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② 영문 대소문자의 혼용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같은 것으로 혼동하게끔 만들 수 있다. ③ 공백은 자칫 컴퓨터가 경로를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문자열로 혼동하게끔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do something.py 라는 파일을 Python으로 실행하고자 할 때 이름을 따옴표로 감싸지 않고 python do something.py 라고 명령한다면, 컴퓨터는 해당 파일을 정상적으로 실행하는 대신에 " do 파일은 없는데요? something.py 는 또 무슨 소리죠?"라고 반항할 수 있다. 영문 kebab case는 이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공백을 대체하는 문자( - )를 입력할 때 shift 를 누르지 않아도 되므로 snake case( _ )보다도 약간 더 편리하다. 단순 띄어쓰기가 아닌 맥락의 분리가 필요한 경우 의도적으로 _ 를 쓸 때도 있기는 하다. 영문자와 숫자, - 및 _ 를 제외한 문자들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 모르므로 사용을 최대한 지양한다. 버전 같은 문서의 각기 다른 버전은 난 다음과 같이 이름 붙인다: ① 작업이 $n$% 완료되었을 경우 버전은 v$n$ ② 완성본 및 준완성본의 버전은 각각 vF (final), vSF (semi-final) 예를 들어 한국항공우주학회 2025 춘계학술대회에 제출할 논문의 반 정도 완성된 안, 그리고 준완성본의 파일명은 각각 KSAS202
11달 전 · #수필

전에 나는 수학귀신 이라는 제목으로 신체의 성장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신적 성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가 22년 5월, 그러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 4년 정도가 흐른 시점이었다. 비슷한 만큼의 시간이 한 번 더 흘렀다. 성장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그때는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는, 추워서 큰 고생을 하기 전에 제때 장갑을 꺼내어 끼는 것(놀랍게도 난 그걸 올해에 와서야 제대로 해낸 것 같다)처럼 사소한 것도 있고, 아주 근본적이어서 내 삶의 전반에 걸쳐 도움이 되는 것도 있다. 오늘은 그 후자에 속하는 것 중 하나를 적어보려고 한다. 사람에게 감정은 왜 존재할까? 감정을 가지는 건 생존에 유리하다. 공포는 우리를 위험에서 도망치게 하고, 분노는 위협에 맞서 싸우게 한다. 희망은 우리가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며, 사랑과 공감은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집단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감정이 항상 유용한 방향으로 작용하지만은 않는다. 감정이 일을 망칠 때가 있다. 너무 기쁠 때, 사실 그건 뭐 큰 상관 없다. 그만큼 좋은 일이 있다는 건데, 다른 건 좀 망치면 어때. 그만한 기쁨은 빈도가 높지 않고 지속시간도 짧으니까 그냥 만끽하면 될 것 같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다.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지배할 때. 좋지 않은 일을 이미 한 번 겪었음에도 거기서 파생한 감정 때문에 다른 일까지 연쇄적으로 망치게 생겼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잠깐 동안만 감정을 느끼지 않는, 오로지 이성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로봇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능할리가. 감정이 드는 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감정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립한, 내가 감정에 대처하는 매뉴얼은 다음과 같다. *** 먼저 기간을 보자. 당신의 감정은 생겨난지 얼마나 되었는가? 1. 방금 생겨난 거라면 쉽다. 순간적으로 드는 감정은 그만큼 빠르게 사그라든다. 예를 들어, 분노는 그것을 유발하는 생체 화합물이 생성되고 다시 사라지기까지 9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별 전략이 필요 없다. 1-2분 가량의 골든타임만 버티면 된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 감정이 주도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자.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은 한 다큐멘터리에 출연 해서, 자신은 책상에 2분과 5분짜리 모래시계를 두고 중요한 결정을 실행하기 전 시계를 뒤집어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 동안 감정이 배제되고, 많은 결정들이 바뀐다고. 그걸 인상깊게 보고 나도 다이소에서 3분짜리 양치용 모래시계를 하나 사서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걸 뒤집을만큼 격정적인 순간은 다행히 아직 없었지만. 2. 오래도록 빌드업되어왔거나 지속되는 감정, 이건 좀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2.1. 우선 감정의 원인을 찾는다. 나는 지금 왜 기분이 나쁜가? 식별에 성공했다면, 그 원인으로 인해 이 정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정당한지 따져본다. 본인의 감정에 정당성을 따진다라, 사이코패스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실로 큰 도움이 된다. 따져보고 나면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거나, 심지어는 별 이유가 없는 경우도 놀랍게도 꽤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엔 전자는 남에 대한 실망, 후자는 우울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 같다. 이 단계를 통해서 정당성이 없음을 밝힌 감정은 이제 몰아내기가 비교적 쉽다. 2.2. 나름의 이유가 있는 감정을 다루는 다음 단계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reframing이라고 부른다. 가령 어떤 학회에서의 발표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면 이를 실패로 여기고 좌절에 빠져있기보다는, 부족한 점을 채우고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당장의 기분이 나아질뿐만 아니라, 이번 실수를 다각도로 분석, 기록하고 미래를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reframing 2.3. 여전히 부족한가? 그럼 이제 적극적으로 싸워라. 감정을 물리칠 수 있는 능동적인 활동을 몇 개 식별해놓고 기분이 나쁠 때마다 그걸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이 활동은,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러니까 취미 같은 것과는 맥락이 약간 다르다. 그런 것들은 한 구석에서의 기분을 끌어올려 다른 구석의 저하된 감정을 중화할 수 있고,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행동들은 저하된 바로 그 구석의 무드 자체를 0에 가깝게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다. 각자에게 효과적인 행위는 모두 다를 것이다. 내게 효과적이었던 방법을 몇 개 소개하자면: 수면 깊은 밤 드는 많은 상념들을 높은 확률로 타파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 늦었으면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디비 자자. 유산소 운동 얇고 길게 할 수 있는 운동, 바깥 풍경을 보며 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더욱 좋다. 야외 러닝, 자전거 타기 같은 것들. 개인적으로 무산소운동은 감정 조절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화 시청 악기 연주 쓰다 보니까 방금 깨달은 건데, 나열한 모든 활동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수면은 뭐 당연하고, 유산소 운동 중에는 호흡과 페이스를 조절하느라, 영화를 시청할 때는 주인공의 상황에 이입하느라, 악기 연주는 한 음도 틀리지 않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그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를 최소 수십 분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감정을 상하게 했던 일과는 강제로 얼마간 분리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행위들은 회복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2.4. 하지만 이 모든 단계를 거치고도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어떻게 할까? 이제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이기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러고 있는 것이 내게 득이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세상이 날 억까하는 게 맞고, 긍정적인 부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숙면과 러닝 정도로는 극복되지 않는 감정을 남기는 일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다고 평생을 좌절과 냉소주의에 빠져 지낼 것인가? 그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움직이는 것이다.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하는 개체다. 이 마지막 비기를 매뉴얼에 추가한 것은 어느날 내게 추천된 유튜브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아래 퍼온 그 영상을 여러분도 꼭 한번 보길 바란다. 1분짜리 영상을 보고 인생이 바뀐다? 그런거 난 잘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상은 내 인생을 바꿨다. 송두리째는 아니어도, 앞으로 살아갈 긴긴 세월 동안 맞닥뜨릴 수많은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풀버전은 여기 있다. 반복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건 실패밖에 없을 때, 내 자신이 자꾸 시니컬해지려고 함을 느낄 때, 나는 항상 코난의 말을 떠올린다. *** 이런 매뉴얼이 없던 불과 몇 년 전의 나를 떠올린다. 참 어렸다. 별거 아닌 일에 삐지고, 딱히 이유도 없는데 우울에 빠져서 거기에 소용돌이처럼 휘말려 들어가기도 했다. 이제는 많이 노련해졌다. 웬만한 일로는 감정이 잘 상하지 않는다. 아니, 상해도 금방 되돌릴 수 있다. 항목 2.4까지 가야 하는 일이 얼마 전에도 있었다. 게다가 2.3 능동적인 활동도 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었어서 꽤나 위태했는데, 2.4를 떠올리니 극복할 수 있었다. 이 매뉴얼을 세우고 나서 극복하지 못한 일은 아직 없다. ⋮ 이러다 보니 요새는 오히려 반대의 고민이 (아주 약간) 생겼다. 인생이 재미가 없다. 더 구체적으로는, 삶이 역동성을 많이 잃어버렸다. 연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일상 속의 즐거움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과거에 존재하던 많은 변수들로부터 비롯되던 재미는 많이 줄어들었다. 뭘 더 얼마나 건강해져보겠다고 탄산음료도 끊은지 2년쯤 되었다(이로써 술 담배 커피 탄산음료 등 그 어떤 기호식품도 소비하지 않는 노잼 인간이 되어버렸다).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감정기복도 크지 않은 사람, 그게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긴 했는데 정작 그걸 달성하고 나니 이게 잘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아이러니. 처음에는 이리로도 구르고 저리로도 구르다가, 나중에 가서는 조금씩의 움직임으로 결국에는 안정적인 지점에 도달하는 stochastic gradient descent처럼 원래 인생이 그냥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여튼 난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여러분이 이따금씩 내 인생에 등장해 변수가 되어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것도 좋겠다.
1년 전 · #수필

때는 스트로크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하던 지난해 10월이었다. 나는 IR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도중에 친구들을 떠나와 대전으로 향했다. 여행 도중에 당일치기로, 한라산에 올라가기 전날에, 그것도 여행보다 늦게 픽스된 일정에 참석하러 중간에 빠진다는 것은 정말로 도리에 어긋나지만, 그만큼 그 미팅은 내게 중요했다. 졸업한 이래로 대외적으로 변변히 내걸만한 어떤 타이틀 없이 창업이라는 미명 아래 살아오던 내 삶에, 이것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계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을 이해해 준, 여행을 함께 떠난 친구들에게는 아직도 미안하고 고맙다. 미팅은 총합 30분도 안 되어 끝이 났다. 내 발표뿐만 아니라, 질의응답에 이어 투자는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즉답을 듣기까지의 모두를 합하여 그랬다. 심사역 분께서 투자가 어려운 이유를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는데 듣는 내 입장에서도 100% 이해가 됐다. 발표와 이어지는 질의응답을 내가 옆에서 제삼자로서 들었다면 나도 투자를 반대했을 것이다. 사실 투자를 받을 이유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그저 ‘투자만 받으면 뭐라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IR을 잡았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사업들을 효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시도해 보길 어언 1년 가까이였다. 그때의 노력을 스스로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경험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만, 적어도 덜 주관적인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런 시도를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의외로 사업 아이템이나 그것의 유망한지의 여부가 아닌, 사업의 모든 것을 나 혼자 한다는 점이었다. 정답지는 없고 답해야 할 질문들만 가득한 상황 속에 지쳐가는데 함께 의논할 사람은 없었고, 내 정신 상태가 요동을 칠 때 이를 상쇄해 주며 힘을 불어넣어 줄 사람도 없었다. 소속의 욕구를 다른 어느 때보다 크게 느끼고 있던 이런 상황 속에서, IR을 했던 바로 그 VC에서 들어온 입사 제안을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발표를 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12월 그 발표를 들었던 심사역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에서 새롭게 투자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고, 아이디어를 줄 테니 해볼 생각이 있냐는 말인줄로 처음에는 알았는데, 대면 미팅으로 다시 만나 들은 자세한 이야기는 곧 그 회사에 들어올 생각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리며, 투자와 재무·회계처럼 내가 생소하게 여겼던 분야의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성공적인 창업이므로 3~4개월 정도만 바싹 일하며 열심히 일하고 또 배우고 나와서 그걸 바탕으로 다시 도전을 이어가자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올해 초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근무지는 부산 센텀시티였다. 서울에 살던 보통 사람이라면 기겁했겠지만, 뭐 내 역마살이 하루이틀 일이어야지. 새로운 도시를 탐험하는 일은 즐거웠고 덜 추워서도 좋았다. 지난겨울에는 덕분에(?) 눈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일도 즐거웠다. 내가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쌓아놓았던 개발 기술 스택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바와 아주 잘 맞았다. 회사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내가 즐겁게 만드는데 돈도 들어왔다! 내가 회사의 유일한 개발자였던 덕에 업무 강도나 형태도 나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과 장기적인 개발 목표 아래 나를 작년 내내 괴롭혀왔던 외로움과 불안이 점점 걷히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이 떠난 그 자리에 이번엔 고민이 들어앉았다. 3~4개월만 회사에 다니고 다시 창업에 도전하자는 그 생각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직장인의 삶에 안주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난 성장하기를 바랐지만 회사 일은 내가 성장하기보단 그간 쌓아놓은 것을 소모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창업 또한, 1년에 가까운 기간을 이미 시도해 본 시점에서 이제는 확실히 성공하지 않는 이상 그 경험들은 더 이상 성장이 아닌 정체, 심지어는 퇴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결국 모든 것은 다음 창업의 성공 가능성에 달려있었고, 그건 높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보았던 수많은 창업팀의 배경, 같은 기간 활동했던 창업 학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사업에 대해 가졌던 태도, 선발되지 못한 창업지원사업들 등 지난 몇 달간 겪었던 모든 환경과 지표가 no-go를 외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한 신념이나 인·물적 자원 그중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다시 시도한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새로운 연구를 시도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 시니어들을 만나 성장할 수 있는 대기업으로의 이직? 사업의 성공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폭풍 성장 중인 스타트업으로의 이직? 아니면 이 회사에서 야망을 펼치기? 오랜 고민 끝에 진학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사업에 있어서든 진로에 있어서든 어떤 선택을 내릴 때 느끼는 것은 그 선택의 중요도가 높을수록 그것의 도출을 위한 논리적인 사고는 점점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는 정량적으로 계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논리적으로 하나의 결론으로 종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되면 선택은 개인의 철학과 신념의 몫으로 넘어간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사업을 경영하는 데에 철학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도 내 철학과 신념을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창공과 우주가 나에게는 그것이었다. 내가 연구개발에 일조한 어떤 물체가 전인미답의 우주 공간에 닿는 것, 그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내 자아실현의 순간으로 생각해 왔다. 그럴 수 있다면 잠을 좀 못 자도, 돈을 좀 못 벌어도 괜찮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포기한 다른 수많은 선택지에 미련을 두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항공우주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고 지인들에게 알리면, 왜 전산(컴공)과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이 돌아오고는 한다. 그 질문을 받은 횟수가 이미 열 번도 넘는 것 같다. 항공과 전산을 모두 전공한 데다가 나의 지난 행적들은 대부분 개발 쪽에 몰려있었으니 아주 자연스러운 물음이다. 그러나 전산 쪽 연구와 웹 개발은 내가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일 뿐, 나의 신념에까지 닿아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택을 내린 이후로 삶은 참 바쁘게 흘러갔다. 우선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은 것은 지난 4월, 가을학기 원서 접수 마감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그 이틀 안에 원서, 자기소개서, 우수성입증자료를 전부 준비해서 보냈다. 마감이 목요일이어서 보통 때 같았으면 회사 다녀오면 시간이 절대 날 수가 없는데, 기가 막히게도 전날 수요일이 국회의원 선거로 인한 공휴일이었다. 하루 종일 해운대 앞에 스타벅스에 죽치고 앉아 자소서를 써 내려갔다. 서류 제출 이후에는 퇴근하면 해운대와 광안리 근처 스터디카페를 전전하며 면접 준비를 했다. 고학년 때부터는 거의 전산과 과목만 들었기에 수강한 지 길면 4-5년 지난 과목들 기억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게다가 회사 일을 마친 후에 또 공부를 하자니 정말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면접 당일까지도 준비 상태는 완벽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면접에서도 똑바로 대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았다. 면접은 5월 중순의 금요일로 잡혀 그날 연차를 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갑자기 딱 그 주에 일주일 전체 휴가 선언을 하여(!)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김에 같은 주 월, 화요일에 소속 연구실 결정을 위한 교수님 여러 분과의 면담도 잡았다. 원래는 면담을 주초에 끝내고 남은 시간 동안 충분히 더 준비할 예정이었는데, 운명의 장난인가, 친할아버지께서 화요일에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병환을 앓고 계셨던지라 감정을 완충할 기간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감정의 동요 속에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로 면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화요일에 뵈었던 교수님 면담부터 금요일 면접까지가 딱 3일인데, 물론 정신·체력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삼일장 전체가 일정이 겹치지 않게 딱 들어맞은 것은 할아버지께서 내 편의를 봐주신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6월 중순에 합격이 확정되면서 회사에 퇴사 예정임을 밝혔고 8월 20일에 마지막으로 출근했다. 막간의 시간 동안 가족여행을 다녀오고 9월 초에 개강하여 이제 연구실에 출근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즐겁게 다니고 있다. 교수님은 존경스럽고 인자하시며 연구실 형·동기들은 친절하다. 무엇보다 나랑 결이 잘 맞는 사람들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교수님을 포함해서 10명대 초반의 인원이 모두 남자인데 또 남고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아니고, 딱 만족스러울 정도로 편한 느낌. 또 일찍 결혼하셨거나 자녀까지 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인생 선배로서 조언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라도 젊고 체력이 좋을 때 결혼해서 자녀를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하곤 하는데, (박사까지 한다는 가정하에) 앞으로의 6년은 내 길이 확정적이라는 안정감과 함께 옆에서 지켜본 연구실 선배들의 모습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전에 이 연구실에서 연구를 해본 경험도 딱히 없다 보니 지원할 때까지도 세부 관심 분야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확정된 이후에 교수님께서 이것부터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면서 주제를 하나 던져주셨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주제가 아주 마음에 든다. 앞으로 분명히 우여곡절이 많겠지만, 잘 해낸다면 앞서 말한 내 자아실현의 순간이 이 주제에서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전전 문단에서 (박사까지 한다는 가정하에)라는 단서를 하나 달았다. 물론 내 희망은 앞서 말한 연구 주제가 나와 너무 잘 맞아서, 석사 이후 박사과정까지 자연스레 이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내 뜻대로 되리란 법은 없다. 생각지 못한 어려움으로 연구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일을 해내려면 죽을힘을 다해야 하는 건 맞지만, 죽을 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나 자신에게 일러두고 싶다.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석사, 이어 박사를 갔다면 난 이 길밖에 몰랐겠지만 한번 밖을 방황하다 돌아온 지금은 바깥에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안다. 항상 그 세상을 염두에 두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 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결코 짧지는 않을 대학원생으로서의 기간 동안 내가 지녀야 할 태도를 여기 일러두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한 인생의 진리이다. 사소하고 당연한 말들을 굳이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여 여기에 나열해 놓는 것은, 올해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삶의 다른 부분들에서 마주친 다수의 상이한 상황들에서 이 이치들이 동일하게 작용하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대부분의 일들은 환경과는 별개로 내가 생각하고 실천하기에 달렸다. 일관적이고 장기적인 노력(consistency and perseverance). 한방은 없다. (루틴의 확립도 포함)
2년 전 · #수필
지지난 토요일(이 글의 작성을 시작한 건 8월 중순)에 대전에 당일치기로 방문해 석사 과정 동안 머무를 집을 계약했다. 집 때문에 대전을 내려간 건 사실 두 번째였다. 다시 2주 전, 그러니까 한 달쯤 전에 이미 한번 내려와 방을 둘러봤었다. 지난 글 에 썼다시피 차를 끌고 멀리 나가는 것을 불사해서라도 조건이 가장 좋은 집을 찾고자 어은동, 궁동부터 봉명동과 월평동까지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없었고 집들이 모두 나열한 조건 중 꼭 하나씩을 만족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돌아온 터였다. 나를 데리고 방을 보여주러 다니신 중개업자분께서 꽤나 열정이 가득하셔서, 내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새롭게 올라온 조건에 맞는 방들 사진을 계속 보내주셨다. 처음 몇 개는 그저 그랬는데 계속 보다 보니 한 개가 괜찮아 보였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테라스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더라. 이 집에도 개인 테라스가 있었고, 북동향이긴 했지만 테라스가 있다면 수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음다음 날 바로 내려갔다. 방은 사진과 다를 바 없었고 비교적 신축에 월세도 높은 편은 아니었다. 온 김에 다른 방들 몇 개도 더 둘러보았지만 그곳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땡볕에 방을 대여섯 개씩 보고 나니 진이 빠질 대로 빠졌고 내 마음은 그곳으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전날 밤에 부모님과 인터넷으로 보았던 아파트 매물이 떠올랐다. 사실 난 이미 학교 근처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있었다. 학부를 다닐 동안 궁동의 두 군데에서 자취했었는데 첫 번째는 3평 정도의 원룸이었고 두 번째는 무려 24평형의 아파트였다(!). 자, 나를 금수저라고 부르기 전에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 사실 난 첫 번째 원룸을 이을 다음 집으로, 똑같은 원룸이지만 8~10평 정도의 큰 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궁동에서는 3~4평, 커봤자 5~6평 정도의 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궁동에 새로운 건물들이 지어지고 원룸이 넓어지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당시 나와있는 궁동 매물 중에서 7평 이하를 제끼고 나니 가능한 다음 매물은 24평형 아파트인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궁동에 몇 개 없는 아파트 중 하나였던 그 건물에 17평형과 24평형 이렇게 두 형태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17평형은 호실이 많지 않아 그중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이 없었다. 월세도 높지 않았다. 높지 않기만 한 정도가 아니라 면적당 월세를 생각하면 원룸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았다. 내가 살았던 24평형 아파트의 보증금/월세에 법정 전월세전환율을 적용하면 이번에 보았던 9~10평 원룸과 조건이 완전히 동일할 정도다. 3년의 시간차와 더 높은 관리비를 감안하더라도 확대되는 면적에 비해 비용 차이는 크지 않았다. 이런 탐색과 비교 과정을 거쳐 24평 아파트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다시 원룸부터 찾아보았는데, 그때 아파트에 살아보면서 면적과 가격 외에도 살기 좋은 집이 갖추어야 할 큰 요소가 또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옵션이었다. 아파트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학부 때 살던 아파트에도 일체의 붙박이 부엌 정도가 가구의 전부였다. 놀랍게도 본가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딱 하나씩 놀고 있어, 이사를 들어갈 때 조립식 책상 2개 + 책장 + 옷걸이 + 매트리스와 함께 용달을 불러 서울에서 대전까지 수송했다. 그렇게 듬성듬성 채워 넣은 가구들은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당연히 부족했다. 그렇다고 새 가구를 사자니 얼마 남지 않았던 졸업에 맞추어 방을 뺄 때 처분하기만 곤란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장장 16개월을 24평의 광야에서 단 7개의 가구와 함께 지냈다. 침대 프레임 없이 그냥 바닥에 바로 매트리스를 깔고 잤고, 에어컨 없이 두 여름을 보냈다 1 . 궁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가구를 더 사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다시 상경할 때는 용달을 부르지 않고 차 두 대에 실을 수 있는 짐만 남기고 모두 팔아치웠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번거로웠는지 모른다. 1. (아파트가 산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시원함 + 난 추위를 아주 잘 타고 더위는 잘 참음)의 콜라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텼지? 그 번잡스러운 일들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웬만하면 원룸을 구하고 싶었다. 그간 신축 건물도 많이 생겼으니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날 밤 인터넷으로 어머니께서 학교와 가까운 월평동 쪽 아파트 월셋집을 몇 개 찾으셨을 때도 결국 우리의 결론은 가능하면 풀옵션 원룸을 찾자는 것이었다. 다시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던 궁동 거리로 돌아와서, 테라스 있는 그 방으로 그냥 계약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먼 길 온 김에 후회하지 않게 싹 다 둘러보자는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사실 테라스 방이 성에 안 차기도 했다. 일조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내게 북향은 사실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찾아본 아파트는 세 군데, 그중 하나는 담당 중개업자가 휴가를 갔고 또 하나는 세입자 사정으로 당장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남은 한 곳만을 겨우 볼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신혼부부가 나를 맞이했다. 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건물은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지만 내부는 리모델링해서 나름 깔끔한 편이었다. 면적은 13평으로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고 2 보증금/월세는 테라스 원룸과 완전히 동일했다! 또 테라스는 아니지만 남향으로 난 베란다가 있었다. 2. 사실 전의 24평 아파트는 정말 투머치 그 자체였다. 난 집이 너무 넓어도 안 좋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거실과 안방을 제외한 작은 두 방과 베란다, 안방 화장실 등 내가 쓰지도 않는 공간들까지 함께 청소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딱 10평대 초중반 정도 면적이면 완벽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여기에 가구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생각하던 와중에 신나게 돌아가고 있던 벽걸이 에어컨이 눈에 띄어, 이건 원래 있던 거냐고 부부에게 물어봤다.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왔다고 남편이 대답했다. 또 그럴 생각이 있으면 설치비 정도만 받고 넘겨주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냉장고와 세탁기를 포함해 여기 있던 가구의 대부분을 모두 당근으로 팔아치울 생각이라고 했다. 엥 뭐라고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행복회로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 가구들을 싼 값에 받을 수만 있다면 아파트의 유일한 결점이 한 번에 해결되는 것 아닌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물어봤다. "그럼 안 가져가시는 것들 다 저한테 파시면 안 될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더 경쾌했다. "그러시면 저희도 편하고 감사하죠." !!! 정확한 조건은 다시 협의하기로 하고, 미소가 한가득인 채로 일단 집을 나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말했다. 하하하하 저 로또 맞은 거 같아요. 땡볕에 먹었던 더위도 온데간데없는 듯했다. 다시 공인중개사 사무실로 돌아와 내가 받으면 좋을 가구를 쫙 정리했다. 찾아보니 가구 버릴 때 드는 폐기물 수거 비용은 생각보다 얼마 안 하더라. 그래서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되는대로 받아놓자고 생각했다. 집에 방문했을 때 부부 허락을 받고 찍어두었던 영상을 돌려가며 가구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발신] 가격 흥정은 내가 직접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중개인께서 대신 해주시겠다길래 마다하지 않았다. 중개인은 내가 적어놓은 목록을 넘겨받고서는,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써놓아서야 싸게 받을 수 있겠냐고 했다. 그러나 대충 이야기해 두었다가 이사 당일에 가서 의견 차이로 누군가의 기분이 상하거나 계약이 파투나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으므로, 그대로 전달하고 그중 양도 가능한 것을 품목별로 가격을 적어 회신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를 부를까, 긴장과 궁금함 속에 20분여가 흐르고 마침내 답장이 왔다: [수신] 오. 내가 그렇게 부탁은 했지만, 정말로 품목별로 빠짐없이 가격이 적힌 메시지를 보고 있자니 참 흥미로웠다. 양의 가격뿐만 아니라 그냥 넘겨줄 수 있는 물건에는 0, 양도가 불가한 물건에는 x가 달려있었고 중간에 내가 제기한 의문에 대해서도 답변이 잘 달려있었다. 심지어 내가 빠뜨렸던 세탁기도 새로 쓰여 있었다. 내가 기다리던 한참의 시간 동안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이건 얼마에 넘길까, 토의하는 귀여운(?)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또 한참이 걸릴 수도 있었던 협상을 한 번의 문자 왕복으로 끝낸 나와 부부의 효율성에 탄복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즐거웠던 건 바로 적힌 가격 그 자체였다! 냉장고 + 세탁기 + 에어컨 + 침대 프레임/매트리스/사이드테이블 + 소파 + 책상 + 의자 + 트레이 + 행거 + 화장대 + 신발장 이 모든 것이 23만 원에! 어떤 구체적인 액수를 상상하고 있던 건 아니지만 내 예상보다는 확실히 낮았다. 부부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그렇게 그대로 받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입자로부터 중개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한 채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알고 보니 전기포트도 만 원에 같이 받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로서는 포트를 쓸 일이 거의 없어 그 효용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중개인의 전화 너머로 세입자의 음성이 들렸다: 아니 다른 물건들을 그렇게 싸게 넘겼는데 뭘 또 고민하고 있대요? ㅋㅋㅋㅋㅋ 거의 무슨 강매에 가까웠지만! 내가 선심 써서(ㅎ) 큰 고민 없이 포트까지 받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포트는 내 본가에 있던, 어머니가 나름 철저한 선정 과정을 거쳐 구매하신 것과 똑같은 모델의 것이었다. 정가는 5-6만 원씩 하더라. 협상의 타결과 함께 나의 새로운 집은 그 아파트로 결정되었다. 운이 굉장히 좋았다. 그 부부는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한다. 그러나 내가 포악한 날씨에 굴복해 아파트를 보지 않기로 했다면 그 행운을 만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자취방을 구하는 후배가 있다면 다음의 말들을 꼭 전해주고 싶다: 1. 아파트를 적극적으로 알아보라. 원룸보다는 대체로 비싸겠지만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삶의 질이 올라간다. 어쩌면 원룸보다 쌀 수도 있다. 2. 무조건 발품을 팔라. 집은 더 많은 것을 비교
2년 전 · #수필
가을부터 대학원을 간다. 내 모교와 주전공이었던 KAIST 항공우주공학과 그대로, 사실상 졸업학기였던 22년 봄학기가 끝나고 대전을 뜬 지 2년 만이다. 진학을 결정할 때까지 나름의 고민과 걱정이 많았고 지금으로서도 설렘 반 걱정 반인데, 그건 오늘 쓸 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풀어보자. 자연히 다니던 회사는 8월 중하순을 끝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단 출근 형태의 풀타임 근무를 중단하는 것일 뿐, 하던 일은 원격·파트타임 근무로 계속 수행할 예정이다. 회사 내 유일한 개발자로서 이미 대부분의 일은 혼자 해오고 있었으므로 원격으로 전환해도 큰 문제가 없고, 대학원생으로서는 풍족한 소득을 바라기 어려우니 부가 소득이 있으면 좋겠다는 나의 생각 + 그리고 나만큼 현재 업무에 적합한 사람을 새로이 찾기 어려우며 찾더라도 인수인계에 자원이 드니 가능하면 내가 계속하면 좋겠다는 회사의 생각이 서로 맞아 가능했던 일이다. 상당히 긍정적으로 검토되고 있으나 새로운 근무 형태에 따른 수당을 협상할 일은 아직 남았다. 또 석사 첫 학기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도저히 부업을 할 시간을 내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올해 초에 입사한 후 회사에서 일한 지는 어언 만 일곱 달이 되었다. 지금도 상당히 바쁘다. 올해 초중반까지만 해도 업무의 템포를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 내가 개발해 오던 사내 소프트웨어가 7월에 시작되는 반기 영업보고부터 도입되기로 결정되면서 작업에 기한이 생겼고, 또 배포가 시작된 이후로는 잔 버그들을 고치고 기능을 추가하면서도 직원 사용에 지장이 없도록 하느라 신경 쓸 게 많아졌다. 이제는 회사 사정에 밝으니 주어지는, 입사 직후에는 없었던 잡다한 일들도 많다. 최근에 프로그래밍 외주도 하나 들어왔다. 작업 내용과 수당을 협의해 오다 나흘 전에 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직후부터 평일에 퇴근하고 나서, 그리고 주말인 오늘도 틈틈이 작업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회사에서는 회사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것에 대해 의뢰해 왔다. 주 업무인 사내 소프트웨어 개발 외의 분명한 추가업무이기에 합당한 추가수당을 요구할 수 있어 보였고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평소의 나는 야근을 해서라도 그 일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했다. 수당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지금 하고 있는 주 업무와 외주만 해도 하루가 꽉 차고, 나는 돈을 버는 것 이외에도 삶에서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요즘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시간이다. 다른 무엇보다 정말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 몸이 두 개든 하루가 48시간이든 둘 중 하나는 현실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요즘 그것을 더욱 절실히 바라는 이유는 시간이 늘어났을 때 따를 추가적인 보상이 이렇게 가시적인 경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학부 때 내가 과제나 시험공부를 하는 데에 두 배의 시간을 들이더라도 석차가 반절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지금 내게 두 배의 시간이 주어질 경우 두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없게 만드는 유일한 제약 요소가, 내가 어떻게 해서도 늘릴 수 없는 유일한 자원이라는 사실이 나를 정말 골치 아프게 한다. 아, 사실 최근에 내 시간이 늘어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고 있는 게 하나 있기는 하다. 바로 LLM. AI hype 속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며 이제는 그 말을 들으면 거부감부터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LLM의 등장으로 정말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프로그래밍은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코드라는 plain text로 이루어지므로 그것을 입출력하는 LLM에 애초부터 적용하기 가장 적합한 업무라는 생각이 드는데, 거기에다 사용 경험이 쌓이면서 모델과 함께 최적의 결과를 내기 위한 소통 방식까지 정립해 나가며 내 작업 효율은 최소 50% 이상 늘어났다. ChatGPT와 GitHub Copilot 등 LLM 기반의 도구들과 함께하며 나는 내 몸이 두 개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찾아오는 산발적인 가속화일 뿐 내가 어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본인의 시간 부족을 타개하는 지속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운영하는 것, 즉 경영뿐이다. 나도 이제 웹개발이라는 좁은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추었으니, 내 휘하에 다른 개발자를 두고 교육, 통솔하며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프로젝트를 빠른 속도로 소화하고 싶다. 그러나 쉽지 않다. 혼자 하는 개발은 템포가 내 마음대로이니 부업으로도 하겠는데 사람을 부리는 순간 그들과 함께 일정 속도를 유지해야 하므로 파트타임으로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풀타임으로 외주를 뛰자니 벌이가 불규칙하고, 나 자신의 장기적인 성장도 미지수이며 ‘업’으로는 개발을 평생 하고 싶지도 않다. 더군다나 팀단위 외주에 fully commit 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잘 꾸려나갈 만한 경영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여러 아이템을 전전하며 창업을 시도해 보고, 그 과정에서 비록 소규모지만 팀 단위로도 움직여보며 절실히 느낀 것은 사람을 이끄는 능력이 내게 정말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어릴 때부터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으레 공부 잘하고 행실이 바른 아이(그게 보통 나였다)가 맡던 반장 자리를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아이들이 꿰차는 모습을 보며, 그 두 가지 능력은 분명히 다르며 후자에서는 내가 압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는 과대표나 동아리 회장단과 같은 자리에 경쟁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멀찍이서 지켜보고는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큰 일을 하는 데에 필요한 능력이 결국 리더십과 경영 능력이라면 일부러 좀 더 부딪히며 길러볼 걸 그랬다. 예전에는 경영자가 왜 그렇게 대우받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 어쩌면 경영이란 가장 궁극의 기술이 아닐까. 사회가 아직 체계적이지 못하던 근대에 군 장성들이 군을 나와서도 각종 요직에 앉는 일이 흔했던 것은 군대가 당시에 사람을 대규모로 부리던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모르겠지만 대학원에 가서도, 그리고 그 후에도 내가 경영을 연습해 볼 기회가 있다면 이제는 그 기회를 누리기 위해 뛰어들어볼 생각이다. 회사 대표님께서 마침 읽어보라고 주신 책. 이런 내 생각과 맞닿아있으려나 근데 맞닿고 아니고가 문제가 아니고 내일까지 150쪽 읽어가야 함 이 글 쓴다고 미뤘는데 큰일 났다 * 이번에 대전에 내려가서는 차를 끌고 다닐 예정이다. 원래는 같은 월세에 넓은 방을 구하기 위해 학교 근방을 포기하게 될 경우에만 차를 타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위의 생각들과 함께 차가 편리함뿐만 아니라 시간을 살 수 있는 수단이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께 '저는 차를 가지고 내려가야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는 이미 그럴 걸로 생각하고 계셨다더라ㅋㅋㅋ. 비록 노쇠한 마티즈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차가 한두 푼도 아니고 기본 몇 천만 원씩 하는데 그걸 살 바에야 필요할 때마다 렌트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고 말지, 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수천만 원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마티즈가 생각보다 빨리 퍼지면 내 돈으로라도 중고차를 또 사지 않을까. 이미 2-300만 원씩 하는 고가의 맥북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 쓴 바 있다. 아마도 그런 다음 물건이 자동차가 되지 않을까 싶다.
2년 전 · #수필

나를 봐 내 작은 모습을 너는 언제든지 웃을 수 있니 너라도 날 보고 한 번쯤 그냥 모른척해 줄 순 없겠니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 나 같은 아이 한둘이 어지럽힌다고 모두 다 똑같은 손을 들어야 한다고 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난 왼손잡이야 나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나나 나나나나나나나나 나나나나나나나 패닉 - 「왼손잡이」 중 나는 왼손잡이다. 작년에 대학 테니스 동아리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어쩌다 나온 이야기였는지 내가 왼손잡이임을 밝히게 됐다. 옆에 있던 친구의 즉각적인 반응은 "엥? 거짓말!"이었다. 내가 뭘 얻자고 그런 거짓말을 해ㅋㅋㅋ 했지만 내가 테니스를 왼손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왼손잡이가 흔치는 않다 보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공식 통계는 없지만 각종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왼손잡이의 비율은 5%대 정도로 나타난다. 전 세계적으로는 성인 전체의 약 10% 정도가 왼손잡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그 비율이 낮은 것은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교정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풍토의 젊은 세대로 갈수록 왼손잡이 비율이 늘어났고, 양손잡이를 선택지에 포함한 동신대 조사에서 그들이 8% 정도로 집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출처: 중앙일보 기사 나 또한 선천적으로는 왼손잡이, 후천적으로는 양손잡이다. 아래의 표처럼 행위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손이 상당히 고르게 양분되어 있다. 이 둘을 나누는 비교적 명확한 기준은, 당연하게도 해당 행위의 수행 능력 습득에 있어 타인의 지도를 받았는지 여부이다. 글쓰기와 식사는 부모님께서 의도적으로 오른손으로 가르치셨고 나 역시 별 거부감 없이 배웠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둘은 왼손으로 했을 때 불편한 점이 많다. 사회적인 시선(은 뭐 이제 거의 없는 것 같지만)을 제외하더라도 어색한 팔과 손목의 각도, 잉크 번짐, 옆사람과의 충돌 등 기능적인 측면에서. 배우지 않았는데 오른손으로 하는 것도 종종 있기는 하다. 당구공 치기 등. 왼손 오른손 그리기 던지기 핸드폰 조작 교통카드 태그 (이게 제일 불편) 자 긋기 (오른손으로 자 잡고 왼손으로 긋기) 수정테이프 긋기 뚜껑 여닫기 책 훑기 (뒤부터) 옷 걸기* 기타 (못 치지만 친다면) 크로스백 매기 (가방이 오른쪽에 가게) 소총 견착, 발사 (초딩 시절 BB탄총 사용 경험에 기반) 쓰기 휘두르기/치기 숟가락·젓가락·포크 들기 양치질 가위질 칼질 큐대로 당구공 치기 권총 발사 (소총과 사용 경험 동일) 무엇으로 해도 이상하지 않음 농구 슛 (둘 다 못함) 행위에 따라 다른, 내가 주로 사용하는 손 *나는 오른손으로 옷걸이를 행거에서 빼어 왼손으로 옷을 걸고, 결과적으로 옷걸이를 다시 행거에 걸었을 때 옷은 왼쪽을 향하게 된다. 그렇게 하니 옷가게에서는 입었던 옷이 다른 옷들과 반대로 걸리는 경우가 자주 생기길래 이것도 왼손잡이의 습성인가 보다 했는데, 왼손잡이들이 다 그러진 않는 것 같다 . 이 말인즉슨 오른손잡이도 나와 같이 거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글씨를 정말 많이 썼고 그만큼 오른손이 단련이 되어, 어느새 그리기도 오른손이 더 편해진 것 같아 내가 아예 오른손잡이로 개종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때 품기도 했었다. 지금도 글에 가까운, 직선이 많이 포함된 그림을 그릴 때는 오른손이 나가게 되는 건 맞다. 그러나 스케치나 붓 터치 등 유연한 스트로크가 필요한 그림은 여전히 왼손이 편하다. 그리고 이렇게 주요한 행위들이나 주 사용 손 분포가 고른 거지, 목록에 담기 어려운 수많은 잡다한 일들은 전부 왼손으로 한다. 왼손으로 글도 쓸 수 있다. 다만 심한 악필에 속도도 매우 느려서, 정말 "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정도이다. 나는 그 정도는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오른손잡이들이 왼손으로 글을 쓰려고 하면 펜에 힘 자체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중학생 때쯤인가, 이런 비교우위를 살려서 아예 양손잡이가 되어보자 하고 일부러 왼손 글쓰기를 연습한 적도 있으나 곧 포기했다. 오른손으로 뻔히 되는 걸 왼손이 못하니까 너무 답답했다. 십수 년 간의 누적 경험은 역시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내가 박명수 씨보다는 잘 쓰는 듯 과거에는 대놓고 박해를 받았고 요즘도 때때로 교정의 대상이 되며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명확하지만, 난 내가 왼손잡이인 것이 마음에 든다.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 왼손잡이가 지능이나 창의력이 높다느니, 위인 중에 왼손잡이가 많다느니 하는 소문들은 다수 연구로써 모두 부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왼손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점은 분명 간혹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을 훑어볼 때 나는 오른손으로 책을 받치고 왼손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때문에 내용을 거꾸로 보게 되곤 한다. 한편 거의 유일하게 왼손잡이가 명백히 유리한 분야가 있는데 바로 스포츠다. 타인을 상대해야 하는 운동에서 왼손잡이들은 자주 보기 어려운 공격 패턴을 상대에게 선사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의 운동을 오른손잡이인 가족이나 강사님께 배운 탓에 애석하게도 그 이점을 하나도 누리지 못했다. 라켓, 방망이, 스틱 모두 오른손으로 휘두른다. 심지어 야구에서는 보통 우투좌타가 가장 유리하다고들 하는데 난 던지는 건 또 왼손으로 해서 좌투우타다. 대학교 2학년, 테니스 동아리에 막 들어갔을 때에는 이런 아쉬움을 염두에 두고 테니스는 처음부터 왼손으로 치려고도 해봤다. 이전에 테니스를 쳐본 경험은 손에 꼽지만 탁구, 배드민턴 등 다른 라켓을 휘두른 세월이 길어 쉽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곧 포기했다. 나중에 자식이 왼손잡이라면 운동은 꼭 처음부터 왼손으로 가르쳐야지. 거울모드로 나를 따라하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아. 축구는 자식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꼭 왼발잡이로 가르칠거다(*나는 오른발잡이다.). ~발잡이는 단지 선택의 문제인줄 알았는데 이것도 선천적으로 오른발잡이 비율이 우세하다 네*? 그러나 듣거라 미래의 아들딸아, 너희는 최소 왼발잡이 가능하면 양발잡이가 될거다. 아빠가 왼발을 못 써서 놓친 기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왼발로 차려고 하면 내 모습이 마치 축구 한번도 해보지 않은 5살 아이처럼 되어버리고 마는걸… *재밌는 건 ~손잡이와 ~발잡이가 어느 정도 <a
2년 전 · #수필

다섯 달만에 돌아온 서울. 가장 좋아하는 계절. 앞으로의 세 달 동안 나는 서울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있고 그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귀경 이후 첫 주말, 토요일인 어제 점심에는 2019년 봄에 미래숲 한중녹색봉사단원 신분으로 함께 내몽골 사막으로 식수 봉사를 떠났던 사람들을 만났다. 봉사단 활동 자체는 일회성이었으나 그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었다. 또 다들 붙임성이 좋아 누군가 만나자고 하면 거기에 잘 호응하여 쉽사리 모임이 결성되므로 다녀온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이 얼굴을 보고 있다.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점심(이었지만 떠들다보니 다섯 시가 넘은) 약속을 마치고는 여의도 <책읽는 한강공원> 행사를 갔다. 요즘 한강은 탁 트인 전망과 날씨 덕에 원래도 책 읽기가 좋은데 거기에 빈백을 깔아놓으니 편안함이 추가되어 정말 독서 낙원이 따로 없더라. 오후 두 시에 열어 아홉 시까지 하니(단 토요일만) 점심 일정을 끝낸 후에도 느지막이 와서 원없이 책을 읽다 가기에 좋다. 나도 여섯 시쯤 도착해서 한참 「삼체」를 읽다가 슬슬 춥고 배고파질 때쯤 짐을 챙겨 떠나왔다. 여유가 되는 다음 토요일에는, 그때는 외투와 요깃거리를 제대로 챙겨 다시 방문해야지. 일요일인 오늘은 원래는 새벽같이 일어나 잠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 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첫번째로 개최되는 이 축제는 기존 3종 경기의 종목 당 거리를 많이 줄여 일반 시민들이 한강공원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축제다. 초급자와 상급자 코스로 나뉘어있는데 상급자 코스의 경우 각 종목의 거리는 수영 1km, 사이클 20km와 러닝 10km. 내가 이 축제를 알게 된 건 지난 수요일이 되어서야였고, 그때는 사전예매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현장접수에 대한 정보는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따로 안내되어있지 않길래 문의 댓글을 달았다. 사전예매가 끝났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한강 횡단. 상급자 코스의 1km 수영은 바로 잠실에서 뚝섬 쪽으로 한강을 건너는 한강 횡단 수영이었다! 수요일에 축제를 알게 되며 그러한 수영 코스를 보았을 때, 내 심장은 마치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처럼 뛰었다. 전에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한강 수영 횡단이 그 즉시 버킷리스트에 올랐고, 그걸 혼자 실행할 깡은 안 되니 이번 축제에 꼭 참여해야만 했다. 현장접수에 대한 안내의 부재는 높은 확률로 그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의미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문의 댓글을 달았다. 돌아온 답변은 놀랍게도 긍정적이었다. 사전예매 인원인 1만 명보다는 훨씬 적지만 축제가 진행되는 토·일요일 양일간 각 300명씩 현장접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상급자 코스는 일요일 아침에만 열렸기 때문에 한강을 횡단하려면 일요일 아침 9시부터 접수를 받는 300명 안에 들어야 했다. 난 그럴 각오가 되어있었다. 밤에 수영복과 래쉬가드, 수영모, 수경, 자전거 헬멧, 에너지바 등등을 모두 챙기고 아침 여섯 시에 알람을 맞춘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에 들기 전 인스타그램 피드를 멍하니 내리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게시물을 보고 말았다. 토요일에 이미 티켓 한정수량이 소진된 데다가 인파우려로 인하여 일요일에는 수영 현장 접수를 받지 않는다는 것. 자정 즈음에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괜히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헛수고하지 않게 되었으니 자정에라도 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러나 주최측이 이렇게 말을 휙휙 바꾸는만큼 내일 아침에 이 공지도 취소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또 품고..! 알람을 취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어나는 데에는 알람도 필요하지 않았다. 4시 55분이 되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야속하게도 공지는 그대로였다. 일단 찾아가서 전날까지 안내했던 걸 당일 밤에 뒤집는 게 어디있냐고, 난 게시물을 못 보고 왔다고 우겨볼 생각도 했으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결국 단념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원치 않았던 여유 속에 아침을 먹고 오늘 대신 무얼 할지를 정했다. 미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 메모장에 쟁여두었던, 가고 싶던 전시는 다음의 다섯 곳이었다: 《윤협: 녹턴시티》 — 롯데뮤지엄, ~05/26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 일민미술관, ~06/23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 + 파트너스》 — 서울시립미술관, ~07/21 《새벽부터 황혼까지: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 마이아트뮤지엄, ~08/25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09/22 이중 녹턴시티 전은 종료되었고 정영선 전은 이미 갔다 왔다. 남은 세 개의 전시 중 포에버리즘 전은 도슨트 프로그램이 금요일과 일요일 이렇게 매주 두 번밖에 없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니 여기로 가보기로 했다. 이 전시는 포스터 때문에 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 스토리로 올라왔던 일민미술관 외벽 사진에서 포스터를 처음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그리움에 관한 전시라는 걸 소개에서 읽기 전부터 나는 포스터에서 본능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논리적으로 뜯어보자면 행복한 기억을 의미하는 클리셰와도 같은 해변가의 저녁 노을에, 과거로 향하는 문을 형상화한 듯한 합성기법이 합쳐진 결과라고나 할까.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이다. 책자도 이렇게 생겼어 포스터를 보고 충동적으로 관람을 결심한 탓에 소개는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그만큼 본 전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대한 각오도 하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충분히 즐겁게 보고 나왔다. 시간에 맞추어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며 일단 빠르게 쭉 한번 훑은 것도 즐거운 관람에 한몫 한 듯. 아래는 내가 인상깊게 본 작품들이다. LLM is everywhere. 너도 GPT에 RAG 붙여서 탄생했니? 차지량, 〈떠나려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본다—길 잃은 새들(10:04)〉 아이맥의 디자인과 색감, 화면 속 이미지 그리고 책상에 래핑된 해질녘 풍경에 iridescent 효과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마치 하나의 보석 같았다. 아니 웬만한 보석보다 더 예뻤다. <img src="https
2년 전 · #수필
© 2026 이건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