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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또 제주도 - 한라
입력 2022.02.13. 15:43 · 수정 2022.02.18. 14:28 · 라이선스
라이선스


혼자서 또 제주도 - 본편에서/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원래도 P지만 여행을 떠날 때면 더더욱 P가 된다. 이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 먹은 건 떠나기 3일 전, 숙소와 교통편 등등을 알아보기 시작한 건 하루 전이다. 사실 저번 자전거 일주 때도 이런 타이밍으로 움직였는데 별 문제가 없었어서 걱정을 안 했다. 근데 웬걸, 한라산 탐방 예약 시스템에 자리가 없었다. 하루에 1500명씩이라 다 찰 거라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나보다.

몇 분을 뒤적거려봐도 자리가 날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매크로를 짰다. POST 요청을 넣어 정원 및 신청인원 정보를 가져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내가 워낙에 쫄보라서 서버에 무리가 가게는 안 짰다. 심심할 때마다 실행을 시키면 일정 내 모든 날짜-시간-코스 조합을 한 바퀴만 시도한 뒤 종료하도록 했고 요청 사이에 0.5초씩 텀도 두었다.

정원과 신청 인원이 상이하면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준다
지난 학기 컴퓨터윤리와사회문제 글쓰기 과제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만...
상시 돌린 것도 아니고 신청은 수동으로 했으니 한번만 봐주십시오.

결과는 성공! 얼마 지나지 않아 빈 자리를 찾아 얼른 주웠다. 더 나은 날짜·코스를 잡고자 몇 번 더 돌렸는데, 돌아가는 양상을 보아하니 신청 취소는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단지 그 자리가 눈깜짝할 새에 다시 채워질 뿐.

자리를 잡음으로써 여행은 확정됐고, 어느새 등산 당일이 되었다. 등산 준비물은 다음과 같았다:

  • 폴리에스터 티셔츠 - 등산복 외투 - 등산복 바람막이 - 경량패딩
  • 무릎보호대 - 히트텍 하의 - 등산바지
  • 등산 양말 - 등산화
  • 아이젠, 스틱, 장갑, 선글라스, 등산가방, 붙이는 핫팩
  • 에너지바 긴거 × 4, 한입짜리 × 8
  • 500ml 생수 × 4

등산을 즐겨 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많은 물품을 아빠한테 빌렸다. 설산 전용 장비는 현지 대여점에서 빌렸고, 전날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이 묵은 아저씨들한테 지원받은 것들도 있었다. 이게 지원받으려고 받은게 아닌데... 같은 방에 중년 아저씨 세 분이 계셨는데 처음 들어갈 때는 간단히 인사만 나눴다. 근데 내가 짐을 싸니까 갑자기 모든 이목이 쏠리더니 내일 한라산 가요? 예약은 했어요?처럼 간단한 물음으로 시작해서 뭐뭐는 챙겼어요? 안에 면티 입으면 땀에 젖어서 큰일나요. 로 확장되더니 결국 다 싼 짐을 갈아엎고 다시 처음부터 같이 싸는 지경에 이르렀다. 티셔츠랑 에너지바도 "이거 가져가면 좋을 거에요"가 아니라 "이거 없으면 너 큰일난다"는 느낌으로 받은 것.

등산 과정 중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셨는데 너무 많아서 여기 나열하기엔 지루할 것 같다. 전반적으로 도움이 굉장히 많이 됐지만 일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글 중간중간에 진실 혹은 거짓 으로 검증할 예정.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첫 번째 조언은...

  • 입산 시각 상관 없다! 6시 땡 치자마자 닌자처럼 뛰어올라가서 비석 사진을 쟁취해야 한다.

예약 시스템 상 내 입산 시각은 8시부터였는데, 아저씨들 말씀에 따르면 예약 날짜만 중요할 뿐 입산 시각은 상관 없었다. 더군다나 시간이 늦으면 정상의 비석 앞에 사진을 찍으려고 긴 줄을 서기 때문에 정상에 누구보다 빨리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QR코드를 뻔히 찍는데도 문제가 안 된다는게 무척 의아했지만 세 분이 입을 모아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고 새벽 5시에 숙소에서 출발했다. 첫차 운행보다도 전이라서 택시비를 18000원씩이나 내고 5시 55분 성판악탐방로 초입에 도착했다.

줄을 서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QR코드가 잘 인식되게 하려는 마음 5%, 아래 적힌 입산 시각을 숨기려는 의도 95%로 QR코드를 확대해서 안내원 분께 보여드렸다. 하지만 안내원 분은 입산 시각을 보여달라고 칼같이 요구했고, "7시 50분에 다시 오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는 입구컷을 당했다.

진짜 설마설마 했는데... 결국 안내소에서 두 시간 여를 기다려야 했다. 이로써 첫 조언부터 거짓!

기다리는 동안 뭘 할까 고민하다가 넷플릭스에 <모럴센스>가 오늘 개봉한다는 게 떠올라서 바로 들어가봤다. 하지만 아직 공개가 되어있지 않았다. 알고보니 개봉 기준 시각이 태평양 표준시. 아침부터 허탕을 두 개씩이나 치다니, 시작이 별로였다.

그래서 그날 숙소 들어가서 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항마력이 딸려서 30분도 못 봤다.

그래도 유튜브 보다 보니까 시간이 금세 갔다. 마음을 다잡고 이제 진짜 출발!

07시 50분 성판악 입산

굳이 오래 기다려서 비석 사진을 찍을지는 아직 고민이 됐지만, 만약 찍는다면 등산객들이 사진 찍고 빠지는 속도보다 새로 도착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것( ṁin > ṁout  ㅎㅎ... )이기 때문에 일단 빠르게 올라갔다.

  • 기온이 낮아서 핸드폰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 정상에 가서 사진 찍으려면 아예 입산할 때부터 전원을 꺼두어야 한다.

라는 조언도 있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동안 사진도 찍지 않고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핸드폰 전원을 켜고 첫 사진을 찍은 건 3분의 2 정도 올라간 진달래밭 대피소 앞.

09시 47분 진달래밭 대피소

이후로 핸드폰을 쭉 켠 채로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하산을 종료할 때 배터리가 51프로였다. 내가 아이폰 13 미니인데다가 앞에 유튜브까지 봤으니 요즘 핸드폰은 배터리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다만 절전모드를 켜놓고 주머니에 핫팩과 함께 두는 최소한의 관리는 했으니 이번 조언은 반맞반틀 드리겠습니다.

두 시간 동안 비스듬한 흙인줄 알았던 길이 알고보니 계단이었던 건에 대하여

올라가는 동안 바람막이·경량패딩을 자주 입었다 벗었다 했는데도 땀이 조금씩 났다. 안에 면티는 절대 입으면 안된다는 말 진실! 면티 입었으면 고생깨나 했을듯. 폴리에스터 운동복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지가 보인다!
어떤 미친놈이 이 급경사에서 썰매를 타 했는데 아까 계단 사진 본 친구 바로 "썰매 타면 재밌겠는데" 시전
11시 03분 정상 도착

세 시간의 산행 끝에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오래 기다려야 하면 비석 사진은 그냥 찍지 말자는 게 원래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또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 반 여를 기다린 끝에 소중한 사진 획득!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서있으면서 바람까지 부니 좀 추웠다. 옷도 아저씨들 코디에 따라 원래 계획보다 좀 가볍게 입고 갔는데, 여기에 몇 개 더 걸쳤다면 베스트였을 듯.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백록담. 정말 아름다웠다. 온통 눈으로 덮여있어서 처음에는 크기가 잘 와닿지 않았지만 제일 낮은 부분의 나무를 보니 어느 정도 가늠이 됐다.
여름에 풀로 덮인 모습을 보러 한번 더 와야지, 그리고 가운데서 집 짓고 살면 재밌겠다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나 여기서나 컵라면을 먹는 사람이 많았다. 컵라면을 먹으려면 무거운 보온병도 챙겨야 해서 나라면 다음에도 안 가지고 올 것 같았는데, 끼니거리가 있는 건 좀 부러웠다. 중간중간 에너지바 착실히 챙겨먹으면 끼니거리 없이도 끄떡없다는 아저씨들 말 믿고 또 안 챙겨갔는데, 내려가서 두루치기 먹는 그 순간까지 속이 허해서 많이 힘들었다. 아쉽지만 이번 조언은 거짓! 선물해주신 핫브레이크들은 감사히 먹었습니다.


이제 다시 내려가보자. 하산할 때는 성판악 대신 관음사 코스로 내려갔다.

제주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하산 시작: 12시 50분)
지금 내 맥북 배경화면

용진각대피소. 원래 이 대피소에 있던 번듯한 건물은 2007년 태풍이 만들어낸 급류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건물이 사라지고 남은 평평한 땅에서 외국인 무리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스노든 3세(Snowden the Third).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누가봐도 멧돼지 발자국. 얘네는 도대체 뭘 먹고 살까?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곳에 분포한 침엽수림도 너무 예뻤다.

겨우살이들
눈삽이 이토록 가소롭게 보인 적이 있던가
입산 8시간만에 처음 구경한 흙

16시 15분, 드디어 끝! 관음사 코스가 워낙 경사가 급해서 무릎 조심하면서 내려오고, 눈이 다져진 곳은 거의 기다시피 해서 내려오느라 올라오는 것만큼이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입구에서 두 시간씩이나 기다리고, 시작은 탐탁치 않았지만 그래도 인생 가장 높은 산을 다치지 않고 다녀왔다. 아주 만족!

마무리는 공기밥 추가한 두루치기로

#제주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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