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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험
입력 2024.05.19. 10:03 · 수정 2025.02.21. 05:47 · 라이선스
라이선스


가끔 일어나는 특별한 경험.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이라서 어디에 물어보거나 찾아보기도 전에 까먹는 것들. 그런 것들이 몇 개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까먹고 지나가지만, 정말 가끔씩 잊어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데 성공하거나 그와 비슷한 경험을 다루는 자료를 찾아냈을 때. 나아가 그들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학술 용어로까지 정의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는 대단한 희열을 느낀다.

아래는 내가 그렇게 발견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발생 빈도가 낮거나 내게 개인적인 의미가 클수록 뒤쪽에 가도록 정렬해놓았다. 이 글의 초안을 완성한 이후에도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것들을 아래 목록에 계속 추가해나갈 것이다. 지난 5월에 정리를 시작한 글감을 지금(2024년 12월 16일)에야 이 글로서 본격적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후술할 특정 상황을 바더-마인호프 현상이라고 부른다는 걸 방금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기시감(데자뷰)과 같은 별의별 심리 현상들이 다 떠오르는데, 이중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은 글에서 배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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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록

크로노스타시스

Chronostasis, a.k.a. Stopped-Clock Illusion

뇌가 새로운 사건을 인식하거나 새로운 작업을 요청받을 때 그것의 첫번째 작용이 시간 상에서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

어릴 때, 다른 걸 보고 있다가 갑자기 시계를 보면 초침이 잠깐 멈춘 듯 했다. 연속 초침 무브먼트 시계가 아닌 이상 초침은 물론 멈춰있다 점프하지만, 그 멈추어있는 시간이 일시적으로 길어진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다음 초들은 정상적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내 시선에 놀라 시계가 잠시 얼어붙은 건 아닐까?! 하는, 당시에도 스스로 시답잖게 여겼던 상상을 함께 하곤 했다.

"새로운 감각의 인식 → 시간이 지연되는 듯한 느낌"이라는 인과관계만 유지한 채 현상을 보편적인 감각에 대해 일반화한 것을 chronostasis라고 부르고, 실제로 청각이나 촉각 영역에서도 이것이 발생한다고 한다. 다만 이 현상을 대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례가 시계 초침이었던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닌지, 위키백과에서도 chronostasis의 대표적인 예로 "멈춘 시계 착각(stopped-clock illusion)"을 들고 있다.

현상을 일으키는 기작은 좀 복잡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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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섬광

Phosphene

망막에 빛 이외의 물리적인 부적당자극이 작용할 때 순간적으로 생기는 빛의 감각.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 어떤 점들이 흩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점들이 무슨 색인지는 확실치 않다. 빨간색이었지만 파란색인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초록색이다. 눈에 압력을 가할 때 점들은 많아진다. 눈이 뻐근해서 눈두덩을 누를 때라든지, 팔뚝으로 눈두덩을 압박하며 책상에 엎드려있을 때라든지. 어둠 속에서의 시선에 따라 점들은 파도처럼 밀려나는 듯하기도 하다.

어릴 때는 이 점들이 마치 우주 공간의 별들을 보는 것 같아, 일부러 눈두덩을 누르며 우주여행을 하는 듯한 경험을 즐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내섬광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눈에 가해지는 압력이 시각세포에 마치 빛처럼 자극을 일으켜 무언가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아래 자료들에 잘 설명되어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것도 내 경험을 충분히 잘 대변하지는 못한다. 나의 경험의 핵심은

  • 어떤 점이나 얼룩 같은 것들이 불규칙하게 분포해있다
  • 그들의 색은 바뀌고 있거나 정확히 식별하기 어렵다
  • 그들은 시선에 따라 느리게 밀려나고 밀려온다

는 것이다. 여유가 생기면 내가 직접 시각화 자료를 만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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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 디스플레이 붕괴

Multiplexed Display Break-up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 등에 표시된 글자를 보며 무언가를 씹을 때 글자가 요동치는 현상.

이건 어디에 정식으로 정의되어있는 용어는 아니고 위키백과에서의 묘사를 내가 명칭으로써 차용한 것이다.

위의 설명 그대로, 무언가를 씹으며 전광판을 보면 글자가 춤추듯이 요동친다. 그러나 모든 화면의 글자가 그런 것은 아니고, 7-세그먼트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전광판 위의 것만 그렇게 보인다.

7-세그먼트 디스플레이.

이런 전광판들 위의 글자는 사실은 특정 시간에 한 전구(세그먼트)만이 발광한다. 글자가 온전해보이는 것은 우리 시각의 잔상 효과 때문이다. 이렇게 작동하는 디스플레이를 multiplexed display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씹어서 우리의 시점에 순간적인 변화가 생기면, 한 글자 안에서도 세그먼트들의 정렬이 깨져 글자가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위키백과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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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포화

Semantic Satiation

단어나 문구의 반복이 일시적으로 그것의 의미를 잃도록 하는 현상.

위키백과 문서는 청각적인 반복을 위주로 작성되어있는데, 나는 청각으로는 이를 경험한 적이 없고 오직 시각으로만 경험했다. 내가 읽거나 쓰고 있던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그 단어의 뜻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르게 낯설었다. 같은 단어가 반복되는 경우에 자주 발생했지만 꼭 반복될 때만 일어나란 법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은 청소년기까지 많았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거의 한번도 없었다. 새로운 단어를 외우기 위해 고강도로 반복 학습하는 노력을 더이상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흔히 "게슈탈트 붕괴"로 잘못 알려지거나 둘은 비슷하지만 다른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말들이 있는데 무엇이 정확한건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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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재채기 증후군

Photic Sneeze Reflex, a.k.a. ACHOO*
    *Autosomal dominant Compelling Helio-Ophthalmic Outburst syndrome
     (상염색체 우성 유전자가 일으키는 돌발성 태양 시각 증후군)

밝은 빛을 바라보거나 눈 주위에 주사를 할 때와 같이 여러 자극들에 반응하여 재채기를 일으키는 의학적 질환.

인류의 18~35%가 보유자라고 하고, 나 역시 그중 한 명이다. 햇빛이 쨍쨍한 날 실내에 있다가 야외로 나와 태양 쪽을 바라보면 높은 확률로 재채기를 한다. 위키백과의 설명이 아주 정확하다: 일반적으로 1~10회(난 ~3회)의 재채기를 유발하고, 최대 24시간의 불응기가 따른다. 불응기가 없었다면 구석기 시대의 내 조상은 눈앞의 맹수를 보지도 못하고 재채기만 하다가 잡아먹혔을테지...

주사로 인한 재채기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뭔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은 든다.

번외로 나는 진한 초콜릿을 먹을 때에도 재채기를 한다. 햇빛으로 인한 재채기는 할 때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면 진한 초콜릿은 거의 100% 재채기를 유발한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최대 3회 achoo 하고 나면 초콜릿을 다 먹을 때까지도 다시 하지 않는다.

단어 조합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움에도 굴하지 않고 약어가 ACHOO가 되도록 때려박아서 명명한 학자들이 좀 귀엽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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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마인호프 현상

Baader-Meinhof Phenomenon, a.k.a. frequency/recency illusion.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 이후 그것이 주변에서 더 자주 보이는 현상.

요즘(2024.12.) 연구실 과제를 하느라 NASA에서 개발한 궤적 설계 도구, General Mission Analysis Tool(GMAT)을 사용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조작할 항목도 많고 적절한 사용을 위해 요구되는 배경지식도 많다보니 아직은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하나하나 배워가는 중이다.

오늘은 프로그램에서 기본 제공하는 튜토리얼 중 비교적 고난도의 것을 따라가보고 있었다. 지구에서 출발한 우주선의 속도를 알맞게 조절해 원하는 화성 주변 궤도에 안착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문서가 말하길 먼저 프로그램 상 우주선의 이름을 "MAVEN"이라고 지정하라고 했다. MAVEN?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고 그 유래가 잠시 궁금했지만 따로 찾아보지는 않고 그대로 진행했다.

그러고 저녁에 퇴근해서 인스타그램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한 릴스를 찾아보려고 내가 좋아요를 눌렀던 릴스 목록으로 들어갔다가 고대로 잡혀서 목록을 다시 정주행하고 있었다. 문득 한 릴스가 눈에 띄었다. 둥근 천체의 왼쪽 절반에 웬 보라색 필터 같은 것이 씌워져있는 영상이었는데 들어가보니 NASA에서 올린 것이었다. 좋아요를 누른 사실은커녕 그 영상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아래 캡션을 들어갔는데 웬걸, 거기에 MAVEN이 있었다. MAVEN은 NASA에서 보낸 화성 궤도선으로, 영상은 MAVEN이 탑재한 자외선 관측 장비가 수집한 자료를 화성 이미지에 입힌 결과였다.

세상에!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접한 단어를 이렇게 몇 시간 후에 완전히 다른 경로를 통해 다시 접한다고? 소름이 돋았다.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놀라지 않기는 어렵지만 이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기억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도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세상에 광주은행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광주에 갔을 때 그 본사를 처음 보았는데 바로 며칠 뒤, 이미 여러 번 지났을 양재의 한 거리에서 문득 광주은행 지점을 보았다.

보고 듣는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인생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었던 어릴 때에는 그런 일이 더 자주 발생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은 학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내 주변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포함한 천문학적인 양의 정보가 항상 존재하고, 나는 어떤 사실을 새롭게 학습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주위 정보를 비로소 받아들인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평소에 놓치고 있는 정보는 얼마나 많은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과거 다른 글에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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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학술 자료를 찾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여러번 겪었던 특이한 경험들. 명칭은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두뇌 색인 오류

나는 어떤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보를 상기하려고 하면 할수록 알던 정보마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회상이 불가능한 현상. 성장기에는 이런 일을 간혹 겪었는데 요즘은 잘 그러지 않는 것 같다. 뇌가 불완전하던 성장기의 유물인 것인지?

학부 때 배운 컴퓨터 이론에 빗대어 이 현상을 이해해보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컴퓨터의 저장소에는 정보를 실제로 저장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각 부분들에 어떤 정보가 있는지 식별할 수 있도록 하는 색인(index)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한다. 어떤 파일을 지울 때 컴퓨터의 파일 시스템은 이 색인만을 지운다. 지우고자 하는 정보를 가리키는 표지가 없어졌을 뿐, 그것이 실제로 없어지는 시점은 그 위에 새로운 정보가 덮어쓰일 때에 와서야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오류로 인해 색인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본 정보만이 지워진다면? 사용자는 색인만을 볼 때는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하다가, 실제 정보에 접근할 때가 되어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뇌가 효율적인 정보 관리를 위해 컴퓨터의 색인과 같은 기작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경험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상념의 반복

고강도 신체/정신 노동을 할 때, 작업과는 관계없는 하나의 임의의 생각이 반복적으로 드는 현상.

나는 이걸 학교 시험을 볼 때에만,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낮잠을 청하려고 누워도 머리가 아직 뜨거워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정말 두뇌를 최대 출력으로 사용할 때에만 경험한다. 그만큼 웬만한 강도의 노동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여러번 겪었는데도 매번 시험을 보느라 너무 바빠서 어떤 생각들이 들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건 한번도 없다. 그러나 그 생각이 시험 내용과는 하등 관련이 없었으며 매번 하나의 생각만이 반복적으로 들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그만큼 정신이 없을 때에만 겪은 현상이기 때문에 이 경험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은 느껴봤을까 하는 궁금증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웹툰을 보던 도중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고 이게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웹툰 『찌질의 역사』 중(32화).

이 현상은 관련한 자료도 찾을 수 없었을 뿐더러 내 나름의 해석도 딱히 없다.

여담인데 『찌질의 역사』는 진정 명작이다. 『죽음에 관하여』와 함께 내가 본 것 중 최고로 꼽는 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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