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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
입력 2023.10.04. 06:32 · 수정 2023.10.05. 10:46 · 라이선스
라이선스


한양도성 한 바퀴를 하루에 돌았다.

친구가 인스타에 올린 완주 사실이 발단이었다. 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서울 사람으로서 안 할 수가 없었다. 날씨도 좋은 지금 당장 하자는 생각에 같이 갈 사람을 구해서 5일 뒤인 어제 완주했다.

관심을 보인 친구들이 몇 있었으나 시간이 안 맞거나 한번에 한 바퀴를 돌 자신은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함께하지 못했다. 남은 친구는 하나였다. 근데 이 친구도 절반 정도 가고 탈주했다. 오늘 새벽출근해야 했으니 이해한다. 시간 날 때 나머지 완주해보길 바라.

점심까진 함께 먹어주어 고맙다

결국 나머지 절반을 혼자 걸었다. 아침 9시에 숭례문에서 출발해서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돈의문에서 스탬프 찍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멍청비용으로 숭례문-돈의문 구간을 두 번 가고 끝은 돈의문에서야 났다.

처음에는 숭례문 출발 반시계방향을 생각했다. 사진을 도심 방향으로 찍게 될테고 그렇다면 오전엔 흥인지문, 오후엔 돈의문 쪽을 지나야 역광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경사가 가장 급한 인왕-백악산 구간을 앞부분에서 끝내는 게 낫겠단 생각에 시계방향으로 계획을 변경했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여정 막바지인 남산에서 내가 지나온 길과 둘러싸인 강북 시내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완주 뱃지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돈의문 터이니 돈의문 출발 반시계방향도 추천한다.

체력고갈로 인한 거지꼴 이슈로 얼굴은 가림
지도와 완주 뱃지

4대문(숙정문의 경우 근처의 말바위안내소)에 있는 스탬프 지점 중 하나에서 지도를 수령한 뒤 스탬프를 모두 찍고 인왕산·백악산(청운대)·낙산·남산(봉수대) 네 군데에서 인증사진을 찍어 제시하면 통과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선 지도만 보고 뱃지를 줬고 내일 한양도성유적전시관으로 인증서를 발급받으러 가는데 인증사진은 아마 거기서 확인할 듯 싶다.

이날 8시간, 4만보 이상을 걷고 300층 가까이를 올랐다. 4만보를 넘긴 건 아마 내 인생에서 처음일 듯. 다행히 장딴지 좀 땡기는 것 이외에 오늘 별다른 증상은 없다.

소감은⋯ 무척이나 보람차다! 이제야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거듭난 느낌이다. 체력적인 성취도 있지만 내가 사는 서울을 더욱 잘 알게되어 아주 기쁘다. 어떤 지역의 지명과 랜드마크들을 알고 그곳으로 이르는 방향을 아는 것은 은은한 안정감과 만족감을 준다. 당연하고 웃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 '뚝섬. 급행타고 선정릉에서 수인분당 타고 올라가면 되겠네, 아니면 시간도 많은데 그냥 2호선 반바퀴 돌까?'

라든가

  • '인증서 발급이 남산공원⋯ 국립중앙박물관 별로 안 먼데 가는 김에 내셔널갤러리전 한방에 끝내자.' (바로 내일 얘기임)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착착 이루어질 때 나는 내가 진정한 서울 사람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이사 온지가 10년이 넘어감에도 태반을 기숙사와 대전에서 지내는 바람에 그 기간에 비해서는 서울 지명을 많이 모르는 나였다. 졸업 이후 서울에 상주하면서 많은 지명을 새로이 익혔지만 강북은 자주 갈 일이 없어 여전히 꽤나 안개 속이었고 그래서 한양 한 바퀴가 더 큰 도움이 됐다. 새로운 발견의 한 예로, 장충체육관을 무한도전에서 본 게 다였는데 드디어 그 앞을 걸어서 지나봤다. 이제 텔레파시 특집을 더욱 재밌게 볼 수 있겠군!

지나는 곳들 중에는 이미 가본 곳들도 당연히 있었다. 사실 가본 곳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인왕산·남산·낙산은 다 이미 가본데다가 성벽들도 형태가 멀쩡히 남아있는데 그걸 그냥 벽으로나 봤지 성벽으로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이게 한양을 한 바퀴 둘러싸는 거대한 성의 일부라고까지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산이 아닌 도심에도 한양도성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고 심지어는 청계천을 지나는 다리도 도성과의 intersection에 해당하는 부분은 난간이 성벽이었다. 강남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유럽 도시들이 자주 풍기는 오래된 도심의 아름다움을 요즘 강북에서 발견하고 있었는데 그럴 근거를 하나 더 확보한 것 같다.

︙

쓸 수 있는 동력이 사람과 짐승의 힘밖에 없던 시절에 이 긴 걸 쌓았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해지기도 했다. 병역으로 한양도성을 쌓은 이들에게 존경을...

심지어 무너지면 지방에서부터 올라와 다시 쌓도록 했다고 함 🥲
︙

이런 고생스러운 경험에 대해 저녁에 부모님이랑 얘기하다 나온 건데 아빠는 대학교 때 직접 만든 뗏목으로 낙동강을 건너볼 생각도 하셨다고 한다. 이행까지는 못했다 하시길래 지금이라도 같이 해보실래요? 하니까 웃기만 하시지만⋯ 나 농담 아닌데. 자전거로 제주도 한 바퀴 돌기로 마음먹고 재작년에 실행까지 한 것도 거의 비슷한 나이에 있었던 아빠의 똑같은 경험이 한몫 했다. 사서 고생은 부전자전인듯.


이제부터는 그냥 photo dump.

제 장기자랑 보고 가실?
건대입구에서 2222번을 봤었는데. 3333부터는 없다더라
팔자 좋구냥
주차차단기 정도 태도만 지녀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답니다
남산을 오르던 도중 갑자기 길이 막혀서 당황했는데
다행히 얼마 안 돌아가서 성벽이 다시 나왔다

다 끝나고 다다른 청계광장에 사람들이 단체로 한복 입고 서있길래 찾아보니까 성균관대학교에서 매년 주최하는, 조선 성균관 유생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던 문화를 계승하는 '고하노라'라는 축제라고 한다. 오후 6시에 개최됐는데 돈의문에서 5시 45분쯤 뱃지를 받고 이동했으니 거의 정확히 개최 시각을 맞춰 지나간 셈이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하다 보면 하루종일 하는 것도 아닌 어떤 행사를 맞닥뜨릴 기회가 더러 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축제와 행사들이 있길래 이렇게 심심찮게 마주하는 것이며 그중 내가 놓치는 게 대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아쉬워지기도 한다.

이건 비슷하면서도 좀 딴 소리인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공부한 영단어 등이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상에서 다시 확인되는 경험이 당신은 있는가? 나는 정말 여러 번 있었고 처음에는 그 우연이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 내 주위에 말도 안 되게 많은 정보가 지나가지만 내 무지로 놓치는 것이 99%인 것뿐이구나라는 생각에 공포스럽기만 하다.

저녁은 수제버거. 친구 따라서 한번 갔다가 단숨에 내 수제버거 목록에 상위 랭크한 바스버거다. 난생 처음 보는 트리플패티 옵션이 있길래 그만 자제력을 잃고 주문해버렸다. 패티 하나 추가 당 똑같이 3,500원이 가산되지만 더블→트리플이 싱글→더블만큼의 Δ감동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바스버거의 최대 강점은 양파다. 평소에 양파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여기는 갈 때마다 상큼한 생양파에 정신을 잃을 것 같다. 바스버거 가면 꼭x10 무료로 얹을 수 있는 생양파 추가해서 드십쇼.

무한리필되는 감자칩에 마요네즈 찍어먹는 것도 꿀맛.

그 청계광장 바로 옆에 있는 뉴스 스튜디오 ON AIR도 처음 봤다! 카메라 위치 앞뒤로 바꿔가며 여러 앵글로 찍더라.

재밌는 건 저기 여자 아나운서 뒤에 '정윤철/스포츠'처럼 다음 뉴스 담당기자/주제가 요약 제시되는데 기사 중에 하나가 멧돼지 포획 기사였거든? 근데 그건 이건희/멧돼지 이런 식으로 안 뜨더라. ㅋㅋㅋㅋ


+ + + +

인증서 수령 완료. 저 아래 분홍 동그라미가 연중 4분기에 완주 시 주는 뱃지다. 분기마다 뱃지 색깔이 다르고 4개 다 모으면 금속 뱃지를 준다고 한다. 자연히 다음 목표는 다른 분기에 훨씬 더 많은 친구들과 / 혹은 훨씬 더 짧은 시간에 완주하는 것.

끝!

#여행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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