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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에 관하여
삶을 한층 더 빛나게 해주는 것들
입력 2023.07.19. 06:46 · 수정 2024.03.08. 13:21 · 라이선스
라이선스


  • 여름
  • 시내버스 오른쪽 맨 앞자리
  • 두껍고 바싹 굽지 않아 육즙이 가득한 소고기 패티
  • 빌라에르바티움 모시글렌
  • 인물이 등장하는 인상파 유화
  • 옅은 햇빛에 어둡게 빛나는 침엽수림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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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나에게 은은한 만족감을 주는, 내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다.

인스타를 보다 보면 나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자신의 취향을 식별하고 경험, 기록하는 능력에 있어 나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이들이 있다. 그들의 피드를 보면 소위 인스타 갬성과는 결이 다른, 여러 게시물을 관통하는 그들의 섬세한 취향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꽤나 존경스럽다.

취향을 구체적으로 식별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요즘 부쩍 생각한다.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게 만든다. 오래된 취향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지식이 깊어지고 인맥이 넓어진다.
  • 취향에 부합하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게 된다(여름이 돌아온다!). 이는 행복이 충만한 삶으로 이어진다.
  • 나라는 사람을 더욱 입체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다. 항공우주공학과 이건희보다는 로켓 대기권 재진입 기술에 열광하는 이건희가 기억에 더 오래 남지 않을까.
이건 취향 하니까 떠오른, 얼마 전에 인스타 광고에 떴던 앱인데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헀다.

취향에도 등급이 있다. 좋고 나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취향을 찾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에 따른 등급. 가령 위의 항목들은 필요한 노력이 커지는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 내가 겨울보다 여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계절이 흐르다보니 자연히 알게 됐다.
  • 모시글렌이 마음에 든다는 건 며칠 전 친구가 뿌리고 왔던 향수가 무어냐고 굳이 물어야 알 수 있었다.
  • 캐나다 국립공원을 방문할 형편이 안 됐다면, 옅게 빛나는 침엽수림을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는 죽을 때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취향이 있고, 위 앱의 이름처럼 삶의 어떤 순간에 '어랏? 나 이거 좋아하네?'하며 예기치 못하게 발견하는 취향도 있다. 몇 번 오지 않는 기회를 잡아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한 발굴할 수 없는 취향도 있다.

내 목표는 세상이 허락하는 범위 안의 모든 취향 발견의 순간을 빠짐없이 겪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시작은 아마도 (재)작년 2월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일 것이다. 같이 갈 사람을 구한다는 친구 스토리를 보고 단지 호기심에 따라나섰던 클라이밍은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가장 큰 취미가 됐다. 스스로는 결코 클라이밍에 입문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전까지 클라이밍이라고 하면 높은 절벽에 줄을 매달고 오르는 모습을 상상했고 그런 익스트림 스포츠는 내 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첫날 경험한 클라이밍의 세부종목—볼더링은 와이어 없이,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문제를 푸는 게 목표였고 그게 마음에 쏙 들었다.

상상과는 전혀 달랐던 실체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막연한 추측이나 무관심으로 지금까지 지나쳤을 세상의 수많은 재미들에 대해 생각하며, 이제는 그것들을 놓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얼마 전에 뉴질랜드에 갔을 때 번지점프에 도전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다른 사람이 뛰는 걸 전망대에서 보자마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눈이 돌아간 것도 있었지만, 번지점프를 내가 생각보다 좋아한다면 그 사실을 알아내기에 모든 조건이 허락된 지금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지체없이 실행한 가장 큰 이유였다(고 초당 7만원의 지출을 정당화해보자. 하하). '이제 번지점프 없으면 못 살겠다'는 정도의 인상을 받진 않았지만, 내가 얼마나 그것을 좋아하는지와 그에 따라 기꺼이 지불할 시간과 비용의 상한을 알아냈고 그런 사실에 큰 의의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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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취향을 식별해내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걸 이따금씩 일깨워주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일상에서 쉽게 만족되기 어려운 취향은, 마치 저 아래 오래된 재생목록에 박혀있는 노래처럼 많이 좋아한다 하더라도 잊어버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이를 달성하도록 시작해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의 방을 꾸미는 것이다. 하이틴 영화를 보면 꼭 주인공들의 방 벽에 어떤 영화나 밴드의 포스터들이 붙어있지 않는가?

영드 「Skins」의 Tony 방에 붙어있는 갖가지 포스터들.
사실 스킨스는 highteen보다는 나락teen 드라마에 가깝지만
그냥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라서 가져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매일 직접 눈에 보이는 곳에 놓음으로써 인생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거처를 계속 옮겨다니는 삶을 살아서, 특히 최근에는 더더욱 메뚜기 같이 살아서 나로서도 방을 많이 꾸미진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해보았다: 다이소에서 철제 격자망을 사다가 거기에 그간 찍은 인생네컷과 여행 사진들을 진열한 것. 모두들 보지 않고도 대충 구도와 포즈를 말할 수 있는, 존재를 뻔히 알던 사진들인데도 눈에 자주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책장 한 구석에 박혀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나를 위해주고 나도 그렇게 할, 내 '취향'인 사람들이 존재함을 되새기고 나면 세상을 사는 일이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여기 당신을 담은, 혹은 당신이 인화해준 사진이 있나요?
그런 당신은 제 삶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람이랍니다.

메타버스에는 회의적이지만 이미 방 벽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와 핸드폰 바탕화면을 내 취향의 것들로 채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1년이 넘도록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바탕화면.
앞서 언급한 "옅은 햇빛에 어둡게 빛나는 침엽수림"이라는
취향을 깨달은 순간 찍은 사진이다.
여러 사진이 순환하는 게 글의 요지에는 더 맞으려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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