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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귀신
입력 2022.05.18. 16:31 · 수정 2022.05.19. 13:25 · 라이선스
라이선스


얘가 지금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인데, 누군지 알아? 동명의 책 속 등장인물인 수학귀신이야. 워낙 책이 유명했으니 바로 알아본 사람도 있겠지.

왜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놈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놨냐 하면,
그런거 있잖아, 어릴 때 진짜 자주 보던 만화 캐릭터들을 한참 잊고 지내다가 어느날 우연히 다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향수 같은거. 사실 어릴 때는 얘(나무위키 찾다가 잊고있던 얘 본명 발견..! 테플로탁슬!)한텐 별 생각 없었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감정이입하게 되는건 얘가 아니라 꿈을 꾸는 어린 남자애였지.

그런데도 어젠가 인스타 피드를 내리다가 갑자기 어떤 게시물에서 얘를 마주치니까 신기한 감정이 들더라고. 어려서는 모든걸 다 아는 선생님 귀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돼서 보니까 그냥 수염 기른 내 또래 같고 그랬던거야.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어. 군대는 갔다왔으려나.

요즘 그런 생각들을 부쩍 하게 되는데
내 나이가 이제 정말 적지 않은 편이라는거. 잘나가는 아이돌이 나보다 어릴때, 캠코더로 아빠가 찍어놓은 유아체능단 공개수업 영상 속 선생님이 어쩌면 지금의 나랑 동갑일수도 있겠다 싶을 때. 날 낳았을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나와 멀리 떨어져있지 않을 때.

그런 내 나이에 주눅이 들거나 하는건 아니야.
물론 일찌감치 성공을 이룬 몇몇 또래와 내 자신을 비교해보면 부러워질 때도 있지만, 나는 나대로 치열하게 살았고 또 소소하게나마 이루어놓은 것들이 있기에.

나이가 찬다는걸 얘기하니까 말인데,
올해는 왠지 모르게 봄이 오고 막 어떤 꽃, 풀이 돋아나는 이 과정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난 그냥 졸업학기에 좀 한가해져서 길을 걷는데 여유가 생겼나부다, 했지. 그러던 와중에 한 친구랑 밥을 먹게 됐는데, 내가 요즘 이렇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친구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대.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난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였어. 근데 계속 생각해보니까 이게 농담으로 치부할게 아닌거같은거야.

내가 점점 커가면서 정신적 성장이 어떤 단계에 도달했다는걸 알 수 있는 표지석들이 몇 개가 있었어. 가장 기억에 남는건 중학생 때였던 것 같은데, 바로 말을 입밖에 꺼내기 전에 한번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전에는 분명히 못하던걸 내가 하고 있더라고.

다가오는 봄을 느끼고 즐길 수 있게 된 사실이 바로 그와 비슷한 또 하나의 표지석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그보다 더 최근에 새롭게 이르고 있다고 느낀 지점은, 내가 노래의 가사를 향유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는 것? 전까지 내가 사랑하던 노래들은 대부분 멜로디에 반한 것들이었어. 가사야 물론 알아들었고 개중에는 마음을 울리는 것들도 있었지만, 가사가 멜로디와 합쳐져서 노래라는 형태로 다가올 때 주는 시너지를 온전히 느끼는 건 최근에 들어서야였던 것 같아.

사람이 성장기가 끝나고 더이상 키가 크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정신 또한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성장판이 닫혀 성장하지 못할거라고 나는 한때 생각했어. 그 순간부터는 지식의 양은 늘어도 그를 이해하는 깊이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거지. 나는 이미 그 기점을 지났고, 부모님께서 해주시는 조언에 대해서도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겠냐’, 하고 생각하는 오만한 때가 있었어.

그런데 요즘도 이렇게 새로운 표지석들을 발견해나가는 나를 보면서, 그때의 생각이 틀렸다는걸 느껴. 청소년기에 비해 속도는 더딜지언정 정신은 계속해서 성장하는 법이었던거야. 그 경향은 아마도 내가 죽기 직전까지 계속될거고.

난 그런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어. 가장 결정적이었던 때는 1학년 말에 호주여행을 가서 국립공원을 실컷 둘러보고 시드니로 돌아가는 열차에 노곤한 몸을 실었을 때. 이어폰에서는 BTS의 Euphoria가 흘러나오고 있었지. 정말 하루가 만족스러운거야. 얼마나 만족스러웠냐면 이보다 내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이 순간을 고점으로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늙어서는 이렇게 돌아다닐 체력도 없어지고, 처음 봐서 가슴이 뛸 것들도 줄어들 테니까.

난 정신적인 성장을 간과한거야. 세월이 흐르면, 같은걸 봐도 느끼는게 많아지겠지. 지난 몇 년 동안에도 꽃과 풀, 노래 가사에 내가 느끼는 게 달라진 것처럼.

지금까지는 내 정신이 알아서 잘 커왔던 것 같은데, 앞으로는 이를 촉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다는 생각도 갑자기 드네. 어쩌면 내가 따로 신경쓰지 않으면 절대 이르지 못할 경지가 있겠다 싶기도 하고. 책을 좀 더 열심히 읽어야 할까봐.

오늘은 좀 빨리 자려고 일찍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이런 잡생각이 나서 그냥 한번 주저리주저리 써봤어.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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