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버리즘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다섯 달만에 돌아온 서울. 가장 좋아하는 계절. 앞으로의 세 달 동안 나는 서울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있고 그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귀경 이후 첫 주말, 토요일인 어제 점심에는 2019년 봄에 미래숲 한중녹색봉사단원 신분으로 함께 내몽골 사막으로 식수 봉사를 떠났던 사람들을 만났다. 봉사단 활동 자체는 일회성이었으나 그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었다. 또 다들 붙임성이 좋아 누군가 만나자고 하면 거기에 잘 호응하여 쉽사리 모임이 결성되므로 다녀온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간이 얼굴을 보고 있다.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점심(이었지만 떠들다보니 다섯 시가 넘은) 약속을 마치고는 여의도 <책읽는 한강공원> 행사를 갔다. 요즘 한강은 탁 트인 전망과 날씨 덕에 원래도 책 읽기가 좋은데 거기에 빈백을 깔아놓으니 편안함이 추가되어 정말 독서 낙원이 따로 없더라. 오후 두 시에 열어 아홉 시까지 하니(단 토요일만) 점심 일정을 끝낸 후에도 느지막이 와서 원없이 책을 읽다 가기에 좋다. 나도 여섯 시쯤 도착해서 한참 「삼체」를 읽다가 슬슬 춥고 배고파질 때쯤 짐을 챙겨 떠나왔다. 여유가 되는 다음 토요일에는, 그때는 외투와 요깃거리를 제대로 챙겨 다시 방문해야지.
일요일인 오늘은 원래는 새벽같이 일어나 잠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쉬엄쉬엄 한강 3종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첫번째로 개최되는 이 축제는 기존 3종 경기의 종목 당 거리를 많이 줄여 일반 시민들이 한강공원에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축제다. 초급자와 상급자 코스로 나뉘어있는데 상급자 코스의 경우 각 종목의 거리는 수영 1km, 사이클 20km와 러닝 10km.
내가 이 축제를 알게 된 건 지난 수요일이 되어서야였고, 그때는 사전예매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현장접수에 대한 정보는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따로 안내되어있지 않길래 문의 댓글을 달았다. 사전예매가 끝났으면 그냥 포기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한강 횡단. 상급자 코스의 1km 수영은 바로 잠실에서 뚝섬 쪽으로 한강을 건너는 한강 횡단 수영이었다! 수요일에 축제를 알게 되며 그러한 수영 코스를 보았을 때, 내 심장은 마치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처럼 뛰었다. 전에 별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한강 수영 횡단이 그 즉시 버킷리스트에 올랐고, 그걸 혼자 실행할 깡은 안 되니 이번 축제에 꼭 참여해야만 했다.
현장접수에 대한 안내의 부재는 높은 확률로 그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의미했지만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문의 댓글을 달았다. 돌아온 답변은 놀랍게도 긍정적이었다. 사전예매 인원인 1만 명보다는 훨씬 적지만 축제가 진행되는 토·일요일 양일간 각 300명씩 현장접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상급자 코스는 일요일 아침에만 열렸기 때문에 한강을 횡단하려면 일요일 아침 9시부터 접수를 받는 300명 안에 들어야 했다.
난 그럴 각오가 되어있었다. 밤에 수영복과 래쉬가드, 수영모, 수경, 자전거 헬멧, 에너지바 등등을 모두 챙기고 아침 여섯 시에 알람을 맞춘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잠에 들기 전 인스타그램 피드를 멍하니 내리다가 보고 싶지 않은 게시물을 보고 말았다. 토요일에 이미 티켓 한정수량이 소진된 데다가 인파우려로 인하여 일요일에는 수영 현장 접수를 받지 않는다는 것. 자정 즈음에 올라온 게시물이었다. 괜히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헛수고하지 않게 되었으니 자정에라도 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러나 주최측이 이렇게 말을 휙휙 바꾸는만큼 내일 아침에 이 공지도 취소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또 품고..! 알람을 취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어나는 데에는 알람도 필요하지 않았다. 4시 55분이 되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야속하게도 공지는 그대로였다. 일단 찾아가서 전날까지 안내했던 걸 당일 밤에 뒤집는 게 어디있냐고, 난 게시물을 못 보고 왔다고 우겨볼 생각도 했으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결국 단념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아홉 시에 다시 일어나 원치 않았던 여유 속에 아침을 먹고 오늘 대신 무얼 할지를 정했다. 미술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부산에 있는 동안 메모장에 쟁여두었던, 가고 싶던 전시는 다음의 다섯 곳이었다:
- 《윤협: 녹턴시티》 — 롯데뮤지엄, ~05/26
-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 일민미술관, ~06/23
- 《미래긍정: 노먼 포스터, 포스터 + 파트너스》 — 서울시립미술관, ~07/21
- 《새벽부터 황혼까지: 스웨덴 국립미술관 컬렉션》 — 마이아트뮤지엄, ~08/25
-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09/22
이중 녹턴시티 전은 종료되었고 정영선 전은 이미 갔다 왔다. 남은 세 개의 전시 중 포에버리즘 전은 도슨트 프로그램이 금요일과 일요일 이렇게 매주 두 번밖에 없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니 여기로 가보기로 했다.
이 전시는 포스터 때문에 가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구 스토리로 올라왔던 일민미술관 외벽 사진에서 포스터를 처음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이 그리움에 관한 전시라는 걸 소개에서 읽기 전부터 나는 포스터에서 본능적으로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굳이 논리적으로 뜯어보자면 행복한 기억을 의미하는 클리셰와도 같은 해변가의 저녁 노을에, 과거로 향하는 문을 형상화한 듯한 합성기법이 합쳐진 결과라고나 할까.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보여준 것 같아 인상적이다.
포스터를 보고 충동적으로 관람을 결심한 탓에 소개는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 그만큼 본 전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대한 각오도 하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충분히 즐겁게 보고 나왔다. 시간에 맞추어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며 일단 빠르게 쭉 한번 훑은 것도 즐거운 관람에 한몫 한 듯. 아래는 내가 인상깊게 본 작품들이다.
너도 GPT에 RAG 붙여서 탄생했니?
아이맥의 디자인과 색감, 화면 속 이미지 그리고 책상에 래핑된 해질녘 풍경에 iridescent 효과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마치 하나의 보석 같았다. 아니 웬만한 보석보다 더 예뻤다.
〈당신을 기억할 무언가〉는 전시실 한 켠에 조성된 상아색 팬트리, 케이크, 라디오, 플레이 리스트로 구성된 설치다. 설치의 모든 요소는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일반적인 규격을 다소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선사한다. 길게 늘어진 팬트리의 스케일은 작가가 관심을 가진 '무한한 시간대'와 같은 추상적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케이크는 과거와 현재를 모두 기념한다는 속성을 가진다. PVC로 만들어진 모형 케이크는, 시간이 멈춘 듯 거의 영원히 유행할 것처럼 느껴지는 소프트 재즈와 함께 행운이 깃든 희미한 미래를 밝힌다. 작가는 '우리는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그 시간의 규모는 (정말 우리에게 닥칠) 미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쓴다. 그러한 연유에서, 작가는 찰나를 보존하고 보호하려는 욕망 대신 과거와 미래를 동등한 무게로 환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물의 속성에서 색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라미네이트 바닥재, PVC 조형물, PE 재질의 타파웨어, 멜라민 코팅 마분지 등의 합성소재 역시 그렇다. 작가에게 키치(kitsch)의 인공적 특성을 넘어선, 사물에 대한 진실된 감정과 반응, 연결은 영원을 추구하는 갈망이나 속임수에 앞설 수 있는 '이중성'이다.
설치미술은 사진으로는 느낌이 살지 않아서 아쉽지만 동시에 그래서 독특하다. 꽤 큰 방을 바닥까지 통째로 꾸민 이 작품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정말 '헉' 했는데 그 공간감이 도저히 사진에 안 담기더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재즈도 마찬가지. 이 방과 위의 아이맥 책상은 마음 같아서는 통으로 떼어다가 내 집 한켠에 두고 싶었다.
수사 브리핑 씬에서 꼭 나오는 슬라이드 영사기.
정연두, 〈내 사랑 지니〉.
〈버섯과 명상〉은 버섯 균근망의 확산 방식과 1923년 관동 대학살을 연동해 다루는 영상 설치다.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당시 지진으로 발생한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본 언론은 재일 조선인이 마을에 테러를 가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확산했다. 작가는 이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과 버섯 균류가 주변 토양에 뿌리 내리는 방식이 유사함에 착안해 버섯과 인간의 물질 상태, 그리고 집단의 기억이 전달되고 흩어지는 과정을 리서치했다. 버섯이 가진 특성은 인간 종의 관점으로 파악하는 진실 혹은 거짓의 규범을 넘어, 인간 사회와 다른 힘과 질서가 세계에 결정적인 국면을 초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요즘 조명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그런가 유리라는 소재를 좋아하고 또 유심히 보게 된다. 유리는 항상 같은 형태를 유지하며 형태를 바꾸려는 외력에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깨지고 만다. 그런 유리가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로 바닥이나 쇠막대기로 된 선반에 늘어져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선했다. 정보의 확산을 버섯 포자의 확산에 빗대어 표현한 점도 물론 흥미롭다.
난 미술 전시 관람을 아주아주 오래 하는 편이다. 평균 관람 시간이 한 시간 정도로 책정된 전시도 나는 서너 시간을 있다 나오기가 부지기수다. 모든 작품을 설명까지 읽어보고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느라 그렇다. 그런데 요즘은 총 소요 시간은 비슷하게 유지하면서도 크게 감흥이 없는 작품들은 빠르게 넘기고 정말 마음에 드는 작품을 보는 데에 시간을 더 크게 할애하는 쪽으로 관람 스타일이 바뀌어가고 있다. 아무리 추상적이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게 맞는 작품이라면 첫눈에도 보기에 좋아야 하며, 그런 작품만 추려도 볼 것이 산더미라는 생각에서다.
전시 관람권을 지참하면 일민미술관 꼭대기에 위치한 신문박물관에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본 전시를 보고 난 후 후식처럼 간단히 보고 나오기 딱 적당했다.
미술관 방문은 여기서 끝. 이어서 광화문에서도 야외에서 광화문 책마당이 열린다길래 가보았는데 이번주는 다른 페스티벌 한다고 열리지 않았더라. 곧 다시 찾아가게써.
기와 지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세종문화회관 건물이 문득 눈에 들어오고 예뻐보이더라. 저게 일반 기와집 만했으면 별 감흥이 없었을 것 같은데, 규모가 주는 장엄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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